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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 이야기

예술이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2)

by 박노찬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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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과연 우리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의 쓸모 논쟁을 살펴보고, 정말 예술이 불안을 극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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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2)

예술의 쓸모?

예술은 정말 쓸모가 있을까? 예술은 배부른 사람들의 장난감 정도의 쓸모 외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 돈 있는 사람들의 투자 대상이거나 여유 있는 사람들의 감상이라고 하는 눈요기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예술의 쓸모 논쟁은 이미 1860년 영국에서 현안이 되었었다.

 

당시 많은 논평자들은 별 쓸모가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위대한 대영제국을 건설한 것은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오히려 산업화의 특질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을 오래 접하면 유약한 성격, 내성적 태도, 동성애, 패배주의 등에 오염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실용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예술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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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아널드

반면, 이와는 달리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예술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암시를 강연이나 신문 기고문에 내비쳤다. 그는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라고 하였다.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들이 늘 노골적으로 이런 갈망을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심지어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널드는 예술을 "삶의 비평"이라고 선언한다. 

 

삶은 비평이 필요하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이 삶의 비평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는 분명히 우리의 삶은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우리의 지위와 그것의 분배에 대한 비평(통찰,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왜 예술의 힘을 빌어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삶의 비평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지위)을 부여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 체계에 대한 도전이 담겨 있고, 풍자나 분노가 서려 있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 <맨스필드 파크 Mansfield Park>

1814년에 출간된 인 오스틴<맨스필드 파크>를 소개하고자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패니 프라이스.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수줍고 겸손한 처녀다. 그런데 재벌인 숙부 토머스 경은 으리으리한 자신의 집 맨스필드 파크에 와서 함께 살자는 권유를 한다. 

 

토머스 경과 그의 부인 버트람 여사는 잉글랜드의 한 마을의 계급사회의 정점에 선 사람들이다. 이웃들은 경외감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두 딸은 넉넉한 용돈에 말도 한 마리씩 가지고 있다. 장남 톰은 오만하고 별생각 없는 청년으로, 런던의 여러 클럽을 다니며 술판을 벌리고 아버지의 재산과 직위를 물려받을 날만을 기다린다. 

 

이러한 집에 들어간 패니는 그들과 같은 지붕 아래 살 수는 있지만, 그들과 같은 발판 위에 설 수는 없다. 사촌들은 그녀에게 온갖 생색을 내고, 이웃은 의심과 동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가족 대부분은 그녀를 시녀처럼 여긴다. 그들은 또 패니가 자신들의 애완 강아지를 괴롭히지는 않을지에 대해 걱정하며, 패니의 옷은 어떨지, 불어를 할 수는 있는지, 잉글랜드의 왕과 왕비의 이름을 알고는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면서 패니의 무지와 저열한 의견, 괴롭기 짝이 없는 천박한 예절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걱정을 한다. 그들은 패니가 자신들과는 같은 부류가 아니며, 앞으로도 같은 부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다. 

 

사실, 패니는 좋은 옷은 딱 한 벌 뿐이고, 불어도 할 줄 모르며, 유럽 지도도 제대로 짜 맞추지 못한다. 토머스 경의 작은 딸 줄리아는 패니가 러시아의 큰 강도 모르고, 소아시아는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느냐고 한다. 그러자 토머스 경의 처제 노리스 부인은 "그렇구나, 얘야... 네 가엾은 사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나 보구나. 네가 그 아이를 배려하고, 부족한 부분을 불쌍하게 여겨야지."라고 말한다.

 

작가의 렌즈는 세상의 렌즈와 다르다

그러나,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누가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좀 더 뜸을 들인다. 오스틴은 10년 이상 맨스필드 파크에서 일어나는 일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패니가 정원을 산책하거나 방에 있을 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의 편지를 읽고, 숙부 가족에 대한 그녀의 관찰을 엿듣고, 그녀의 눈과 입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그녀의 영혼을 응시한다. 그 과정에서 오스틴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드문 덕목을 간파한다. 

 

숙부의 두 딸들과는 달리 패니는 젊은 남자에게 큰 집과 작위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이 없다. 패니는 사촌 톰의 일상적인 잔혹성과 오만에 상처를 입고, 숙모가 경제적 능력을 기준으로 이웃을 재단하는 태도에 움찔한다. 패니의 친척들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지위의 위계에서는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만, 다른 지위 체제, 즉 작가의 선호에 따른 위계에서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숙부의 큰 딸 마리아의 결혼관을 통해 오스틴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마리아의 구혼자 러시워스는 마리아의 미모에 반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기에 곧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상상한다. 마리아는 러시워스와 결혼을 하면 아버지보다 더 큰 수입이 생기고 런던에 집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러시워스와 결혼하는 것이 분명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작가 오스틴은 도저히 이러한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 또 독자가 그렇게 평가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져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하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맨스필드 파크>의 결말부에 도달하면, 패니는 비록 우아한 드레스나 돈도 없고, 불어도 할 줄 모르지만,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임이 드러난다. 반면 숙부의 가족들은 작위와 교양은 있지만 도덕적 혼란에 빠진다. 토머스 경은 속물근성 때문에 자녀교육을 망치고, 딸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했다가 감정적 대가를 치른다. 맨스필드 파크의 위계가 거꾸로 뒤집힌다. 

 

그러나 오스틴은 설교자처럼 퉁명스럽게 진정한 위계의 개념을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위대한 소설가 특유의 기예와 유머로 우리가 진정한 위계에 공감하고, 그 반대의 위계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나가며 : 예술가의 야망

오늘의 글은 작가 오스틴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예술의 쓸모를 얘기하면서 문학 얘기만 했다. 물론 알랭 드 보통은 뒤이어 여러 화가와 비극 및 희극을 다룬다. 문학 역시 창작이라는 큰 범주의 예술로 본 것이다. 문학은 글로 그리는 예술이다. 회화는 그림으로 말하는 예술이고, 희비극은 극장이라는 무대 위에 올려지는 예술 작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야망을 갖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어떤 야망일까? 그들은 저마다의 도구를 통해 우리 인간 삶을 비평하고, 그럼으로써 그 삶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술을 통해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세상의 눈이 아닌 예술가의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삶에는 이유가 있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나만의 가치가 있지 않는가? 내 삶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불어넣고, 스스로 공감하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예술은 기꺼이 우리를 도울 능력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100권의 자기 계발서보다 위대한 문학작품 1권, 위대한 예술 작품 하나에서 우리는 더 큰 효과를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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