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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 이야기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이해하기 - 정치적 관점으로 불안 극복하기(알랭 드 보통)

by 박노찬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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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능력주의 사회는 어떤 기준으로 지위를 분배할까? 지위 분배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또는 강요되는 일종의 이념 내지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러한 기준이나 이념에 대해 '왜 그래야만 하는가?'와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중 "정치" 파트를 중심으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어 보자. 또한 그런 과정 중 지위로 인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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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이해하기 - 정치적 관점으로 불안 극복하기

능력주의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자격

21세기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알랭 드 보통은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 연구를 포함)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성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결과라고 이해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과 같은 미덕이 있다고 칭송받는다. 그렇다면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받을까? 경제적 실패 역시 능력과 결부되어 판단된다. 즉 능력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적 실패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수치심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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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 미덕?

능력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이며,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유한계급론>에서 소스틴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19세기 초부터 돈은 상업적 사회에서 그 구성원을 평가하는 중심 기준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사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돈은 필수적이다. 평판을 유지하려면 재산을 획득해야 한다. 높은 부를 축적하지 못한 구성원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 어려우며, 그 결과 자기 자신의 존중도 받기 어렵게 된다.
 
베블런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업사회에서는 '덕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리게 된다.
 

경제적 실패 = 수치?

능력주의 사회에서 왜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소유하려 할까? 그것은 그 소유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근대 물질주의 사회에서는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필수품"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심리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필수품조차 마련할 수 없는 궁핍한 사람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어떠할까? 앞에서 우리는 돈이 미덕의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덕의 측면에서 궁핍을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능력주의 사회에서 돈에 윤리적 가치가 부여되었다면, 필수품조차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극단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불안>에 나오는 얘기를 빌리면, 극단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는 그런 상태로 빠져들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운이 없어 그런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돈을 모을 수 있는 미덕이 없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경제적 실패에 빠진 사람이 겪는 고통은 무엇일까? 궁핍으로 인해 겪는 육체적 고통일까? 아니면 궁핍한 자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에서 나오는 수치감일까? 어떤 것이 더 큰 고통일까?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는가? 가난 때문에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수치감 말이다. 
 
지금까지의 얘기에 독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나는 화가 난다. 왜 부에는 '품위'가 따라붙고, 가난에는 '상스러움'과 '수치'가 따라붙을까? 돈을 벌지 못하면 어째서 무조건 무능력한 인간, 부도덕한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부와 가난이 도덕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공감해 줄 사람은 없단 말인가? 걱정하지 마라. 당연히 있다. 있어야만 한다. 
 

경제적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진정한 능력이란 무엇인가? 능력을 연봉이나 돈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저절로 부자가 되고 나쁜 사람은 가난해지는가? 부가 미덕의 증거라면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인데, 세상은 결코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세상에는 사기와 악랄한 방법으로 돈을 축적한 사람도 얼마든지 많으니 말이다. 
 
조지 버나드 쇼소득을 근거로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일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부의 차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생기는 것을 막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또 존 러스킨 역시 능력주의적 이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40년간 부자와 빈자 수백 명을 만나 성격을 연구했는데, 연구 결과는 부자와 빈자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득과 명예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많은 외적 사건들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자로,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부자가 되고 빈자가 되는 것은 도덕(미덕)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 역시 삶의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는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는 섣부른 판단을 억제하라고 한다. 대신 그에게 어떤 종류의 영혼이 있는지, 그의 영혼은 아름다운지, 그 영혼은 능력이 있고, 행복하게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는지, 그 영혼의 부는 자신의 것인지, 빌려온 것인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부와 미덕을 연결시키지 마라

경제적 능력주의의 이념(이상)에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돈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와 미덕을 교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행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키고, 나아가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현대 능력주의의 이상에 문제를 제기한다. 장 자크 루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계의 역사는 야만에서 출발하여 훌륭한 도시로 진보해 왔을까? 루소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았지만 요구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특권적 상태로부터 우리 자신의 인격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생활 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도록 강요받는 상태로 퇴보해 왔다고 말한다. 
 
선사시대에 인간은 신문을 읽지도 않고, 장을 보지도 않았지만,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고, 소박한 오락을 즐겼다. 그러나 근대의 상업적 문명은 우리를 이런 상태로부터 떼어냈으며, 풍요의 세계에서 선망과 갈망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얘기가 있으니,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 이야기다. 16세기 미국 인디언들은 물질적으론 소박하지만 심리적으론 보람 있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불과 수십 년 만에 인디언 사회는 급격히 변모했다. 유럽의 과학기술과 사치를 접촉하자, 중요한 것이 바뀌어 버렸다. 그전에는 지혜나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무기, 장신구, 술을 소유하게 되면서, 은 귀고리, 구리와 놋쇠 팔찌, 주석 반지, 베네치아 유리로 만든 목걸이, 얼음을 뚫는 끌, 총, 술, 솥, 구슬, 호미, 거울 등을 갖고 싶어 안달하게 되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이러한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래야 유럽 시장이 요구하는 동물 가죽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사냥을 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인의 유혹에 넘어간 인디언들은 전에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필수품이 된 많은 것들을 갈망하게 되었다. 
 

욕구의 왜곡

전에는 있지도 않았기에 욕구조차 느낄 수 없었던 제품들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처럼 보이고, 더 큰 행복을 누리게끔 해 줄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바로 무수한 상업적 광고들이 쏟아내고 있는 은밀한 욕구의 왜곡이 아니던가?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어떤 자리에 오르면 지속적인 만족(행복)이 보장될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성취하고 나면 그때부터 관심이 사라지고, 또 다른 무언가의 유혹에 눈길이 가지 않던가? 인생은 마치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 반복되이 대체되는 과정처럼 보인다.
 
불안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불안은 다른 불안으로 대체된다. 하나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목표를 달성하면 이내 다른 불안이 생긴다. 우리가 무엇을 달성하든 궁극적인 평안은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것 같다.
 
광고는 교묘히 어떤 물품이라도 우리의 행복 수준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비밀에 대해 침묵한다. 대신 어떤 것을 손에 넣으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우리의 덧없는 욕구를 부추길 뿐이다. 그리하여 영끌해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우선순위의 왜곡

경제적 능력주의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왜곡시킬까? 우선순위와 관련하여 경제적 능력주의는 물질의 축적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운다.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의 자아상을 물질적 축적으로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적 부의 축적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아니, 결코! 
 
존 러스킨은 이런 식으로 우선순위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격분했다. 그는 19세기 영국인이 역사상 부에 가장 강한 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이 부유하지 않으면 수치를 느꼈고, 다른 사람이 부유하면 질투를 했다. 러스킨 자신 역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에 대한 생각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고 인정했다. 
 

진정한 부(wealth)란?

사전에 따르면 "부"는 단지 많은 액수의 돈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차적인 의미 역시 그러하다. 부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등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의 특징을 단순히 "삶"이라 불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가 강박적으로 생각한 부는 바로 이런 종류의 부였다. 당신은 어떤 부를 갈망하는가? 
 
이제 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어떤 나라가 가장 부유한 나라일까?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누가 가장 부유한 사람일까? 자신의 삶과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고 러스킨은 말한다. 
 
매슈 아널드 역시 <교양과 무질서>에서 "오늘날 영국인 가운데 열에 아홉은 큰 부가 위대함이나 행복의 증거라고 믿는데, 사람이 뭔가를 이렇게 굳게 믿기도 힘든 일이다."라고 탄식하면서, 부는 행복을 확보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행복은 "내적인 영적 활동이며, 그 특징은 친절과 빛과 삶과 공감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나름 정의하였다. 
 
토머스 칼라힐도 <미다스 Midas>(1843)에서 "우리는 삶의 호화로운 장식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사는 것은 잊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비싼 술을 마시지만, 그 중심을 보라. 과연 어떤 축복이 늘어난 것인가? 더 나아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강해지고, 더 용감해졌는가... 더 행복해졌는가?" "마몬 숭배" 즉 배금주의가 진정한 축복과 행복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나가며: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라

이데올로기적 믿음을 주로 퍼뜨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지배계층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사회적 지위 문제로 불안을 겪고 있는 우리들은 능력주의가 베푸는 지위의 분배에 대하여 "꼭 이래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능력에 따른 지위의 분배는 오늘날 현대 능력주의 사회가 지위를 분배하는 방식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물음을 갖는다 하여 당장 지위의 문제가 해결되고,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경제적 실패로 인해 겪게 되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덜어 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위의 분배 방식에 대한 사회적 탐구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위 분배 방식은 원래 처음부터 이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마다 또 사회마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은 달랐다. 높은 지위를 얻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대마다 다른 능력이 요구되었다. 물질적 부를 이룬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니었다.
 
지위 분배 방식에 있어 사회적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무엇일까? 알랭 드 보통은 그것을 "정치적 관점"이라 부른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제도들에 대해서 그것이 존재하고 존재해 왔기에 늘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히고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문이나 대중매체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지위와 관련해서 생기는 불안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 과정을 통해 피해의식 내지는 수동적 태도, 혼란 등은 현저히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사회의 이념(이상)들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하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지위로 인한 불안 문제를 겪고 있는가? 그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자. 경제적 실패를 하였는가? 그래서 패배의식, 수치심이 드는가? 그렇다면 부에 대한 자신의 왜곡된 견해를 수정해 보라. 진정한 부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 내려 보자. 무엇이 진정한 부라고 여겨지는가? 그래도 부자가 되는 것이 최선의 우선순위를 차지하는가? 그렇다면 자신을 진짜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부는 어떤 부인지 생각해 보라. 과연 그것이 물질적 부일까? 요즘 행복한 감정을 느낀 사건이 있는가? 아마도 돈보다는 그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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