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지위로 인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꼽는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불안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우리들에게 제공해 줄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에 대한 생각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기독교적 경고라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은 유한하며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까? 세속적인 것일까, 영적인 것일까? 카드놀이나 저녁 파티일까, 진실과 사랑일까?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관심사를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갑작스런 인식이 찾아올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될까? 그동안의 자신의 삶이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따라 살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그 결과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다른 사람)의 가치를 따라 살았다는 후회가 밀려오지 않을까?
특히 지위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고 살았음이 깨달아질 것이다. 또한 죽음을 생각하자 지금껏 품어 온 야망들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거룩한 부르심이기도 하다.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했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부, 명예, 권력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 명예, 권력을 통해 얻는 사랑은 조건부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신경 쓰게 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지위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는 데에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는 큰 업적을 쌓은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 존재라도 결국은 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 에드워드 영은 <밤 생각>(1742)에서 다음과 같이 읊는다. "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 / 부의 냇가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 / 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그렇다. 토머스 그레이의 표현처럼, "문장의 자랑, 권력의 허세, /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 똑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이다.
폐허와 광대한 풍경의 효과
폐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너져 내린 낡은 돌들을 바라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폐허는 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임을 말하고 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중 중요한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광대한 풍경 역시 불안을 해소하는 데 있어 효과가 있다. 폐허가 무한한 시간의 대표라면, 광대한 풍경은 무한한 공간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인간은 한낱 점과 같고, 찰나를 사는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한과 유한 사이, 광대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잘 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광활한 우주,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모두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
세속적 지위와 영적 지위
지위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예수님, 특히 그의 직업과 기독교 상의 지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직업은 갈릴리의 목수였다. 당시 갈릴리의 목수들은 큰 소득을 올릴 수 없는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난한 목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서로 다른 두 정체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된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에게 적용된 도식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지위를 가진다. 하나는 직업, 소득, 평판으로 결정되는 세속적 지위이며, 또 하나는 그의 영혼에 따라 신의 눈에 의해 결정되는 영적 지위이다. 따라서 세속적 영역에서 권세가 있고, 존경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영역에서는 황폐하고 부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427)에도 등장한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기독교적 관점과 로마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같은 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하찮은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선을 행하고, 신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 가치 체계를 '세속 도시'와 '신의 도시'라고 부르는 두 도시로 표현했으며, 이 두 도시는 심판의 날까지 공존한다. 세속도시에서는 왕이라도 천국에서는 하인일 수 있다. 기독교적 지위 체계에서는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경제적 능력주의 하에서 돈에 부여된 도덕성의 무의함을 보여준다. 기독교적 지위 이해에서는 가난은 결코 부도덕 내지 미덕 없음의 결과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요한 자이지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고, 왕 중 왕이지만 종의 형체를 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준다.
나가며: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라
기독교는 어떻게 지위로 인한 불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기독교는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둘 것인가를 묻는다. 무엇을 갈망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진짜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세속적 지위가 아닌 영적 지위에 관심을 가지도록, 세속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신의 도시의 시민이 되라고 독려한다.
우리는 어떻게 경제적 능력주의 사회에서 영적 지위와 신의 도시의 시민이 되고자 갈망할 수 있을까? 죽음을 기억(memento mori)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지위에 오른 사람 역시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한낱 일시적 영화에 불과하며, 그 사람이나 우리나 차이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위로 인한 불안보다는 우리의 불안한 영적 상태를 더 걱정하게 될 것이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질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다. 또 낮은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하신다. 소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오르지 못한 지위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죄인을 위해 대신 죽는 십자가를 택하셨다.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 그 길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었다. 죽음으로 생명을 얻고,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고난으로 영광에 이르는 길. 그 길이 바로 예수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었다.
고난주간에 죽음을 통한 지위 불안 문제 해결을 생각하니 더욱 뜻깊다. 예수는 죽음을 택함으로 인류 구원의 문제를 완성하고 하늘에 오르셨다. 우리도 죽음을 택한다면 지위 불안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바로 세속적 지위에 대해, 높아지려는 갈망에 대해, 부자 되려는 욕심에 대해 죽음을 택한다면 더 이상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낮아지지 못하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지 못하는 우리의 낮은 영적 상태에 대해 더 불안해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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