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과 철학 이야기

사회적 통념을 뒤집은 예술가들 : 장 밥티스트 샤르댕, 토머스 존스, 크리스텐 쾨브케

by 박노찬 2024. 3. 21.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우리의 불안을 치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을 통한 불안의 치유는 어떻게 일어날까? 그것은 사회적 통념을 뒤집는 방법을 통해서다. 오늘은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하는 세 화가의 그림을 통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1. 장 밥티스트 샤르댕, <회복기 환자의 식사>

사진-회복기 환자의 식사, 샤르댕
장 밥티스트 샤르댕, &lt;회복기 환자의 식사&gt;

 
위의 그림은 장 밥티스트 샤르댕이 1746년에 그린 <회복기 환자의 식사>이다. 가구도 별로 없는 방에 평범한 옷을 입은 여자가 서서 보이지 않는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고 있는 그림이다. 샤르댕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샤르댕의 비판자들은 회의적인 어조로 그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도 이 그림을 보며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지는 않는가? 이 그림을 보며 이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우리 역시 그림에 대한 선입견 내지는 편견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림에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데 왜 이런 그림을 그릴까 하는 생각일 것이다. 
 
위의 그림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 속 평범한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샤르댕은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신기하게 빵조각, 깨진 접시, 칼과 포크, 사과와 배 등을 주로 그렸고, 나아가 평범한 부엌과 거실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노동 계급이나 중하층 계급 인물들에 관심을 쏟았다.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위대한 화가가 그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반응형

아카데미는 1648년 루이 14세가 처음 만들었는데, 중요성을 기준으로 여러 장르의 회화의 등급을 정했다. 이 위계의 맨 윗자리는 역사화가 자리 잡는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고결한 면을 표현하거나, 성경의 교훈적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들이 해당한다. 그다음은 초상화인데, 왕이나 왕비의 초상들이었고, 세 번째는 풍경화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경멸적으로 '풍속화'라 불리던 그림이 자리 잡았다. 여기에는 귀족이 아닌 사람들의 가정생활이 담겼다.
 
이처럼 예술의 위계 역시 화가의 스튜디오 바깥 세계의 사회적 위계와 일치했다. 바깥 세게는 말을 타고 자신의 소유지를 시찰하는 왕이 수수한 옷을 입고 달걀을 까는 여자보다 우월한 곳이었다. 
 
그러나 샤르댕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 위계를 뒤집어 버린다. 샤르댕은 당시 세상의 인생관을 전복해 버린다. 세상은 여자가 집 안에서 하는 일 또는 햇빛에 반짝이는 낡은 도기를 하찮게 여기지만, 샤르댕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마르셀 프루스트에 의하면, "샤르댕은 배 한 알이 여자만큼 생명으로 가득할 수 있고, 물단지가 보석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2. 토머스 존스, <나폴리의 지붕들>과 <나폴리의 건물들>

사진-나폴리의 지붕들, 나폴리의 건물들
토머스 존스, &lt;나폴리의 지붕들&gt;(상), &lt;나폴리의 건물들&gt;(하)

 
위의 두 그림은 웨일스의 화가 토머스 존스가 1782년에 그린 <나폴리의 지붕들><나폴리의 건물들>이다. 존스의 그림 역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존스가 묘사한 장면은 지중해 어느 도시를 가나 볼 수 있다.
 
좁은 도로를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서로 밀치다 못해 이웃 건물의 헐벗은 옆구리까지 파고든다. 오후의 더위로 인해 거리는 조용하고 창의 셔터는 반쯤 내려가 있다. 어떤 방에서는 움직이는 여자의 윤곽이 흘끗 보일 수도 있고, 다른 방에서는 잠자는 남자의 윤곽이 슬쩍 보일 수도 있다. 가끔 우는 아이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노파가 녹슨 난간이 박힌 테라스에 빨래를 너는 모습도 보일 수 있다. 
 
또한 강렬한 햇빛이 빛 바랜 벽과 만난다. 파이고 갈라진 모든 곳이 이 빛에 드러난다. 어부의 거칠고 투박한 손처럼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혼란스러운 건물들은 이곳이 다양한 삶이 전개되는 도시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소설 이야기 못지않은 복잡한 삶, 정열, 권태, 장난, 절망 등이 뒤섞인 다양한 삶 말이다. 
 
대개는 로마의 신전이나 르네상스 교회의 현란한 매력에는 눈이 쉽게 가지만, 이토록 평범한 지붕과 건물 들에 눈이 가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존스는 이처럼 무시당해 온 광경을 화폭에 담아 우리 눈앞에 펼쳐 놓는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고 설득한다. 평범한 이 그림들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3. 크리스텐 쾨브케, <리메 킬른의 동네 풍경>

사진-리메 칼른의 동네 풍경
크리스텐 쾨브케, &lt;리메 킬른의 동네 풍경&gt;

 
이 그림은 19세기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쾨브케가 1834~35년에 그린 <리메 킬른의 동네 풍경>이다. 쾨브케 역시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놓는다. 위의 그림은 그의 고향 코펜하겐의 여름 오후에 들판에서 되새김질하는 소 두 마리를 그린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삶에서 누리는 기쁨에 만족하는 질서 잡힌 공동체의 이미지를 주로 그렸다. 
 
쾨브케의 예술 역시 샤르댕이나 존스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쾨브케, 존스, 샤르댕의 예술은 우리가 보통 그림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매우 벗어나 있다. 
 

나가며 : 평범함 속의 위대함

우리는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위와 같은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무엇들을 발견하였는가? 그저 '왜 이런 평범한 것을 그렸지, 이상하네. 별로 위대해 보이지도 않는데.'라고 생각하며 다음 그림으로 발걸음을 너무도 빨리 옮기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마음도 어쩌면 프랑스 아카데미가 정해놓은 예술의 위계 체제에 세뇌당하지는 않았는가? 
 
이제 우리도 위 그림들을 보면서,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속물적 관념을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또한 그런 시각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우리의 삶에도 저마다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달걀을 까는 여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나폴리의 지붕과 건물은 바로 나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이 아니던가? 리메 킬른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나른한 오후의 풀밭은 그저 지루하기만 한 나의 일상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위대한 화가들은 그런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위대한 것들을 그리고 있으니, 이제 저 그림들과 나의 일상 속에서 그 위대한 무언가를 발견해 보자. 
 
☞ 오늘의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하기와 ♥ 부탁드립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2024.03.18 - [문학과 철학 이야기] - 예술이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2)

예술이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2)

예술이 과연 우리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의 쓸모 논쟁을 살펴보고, 정말 예술이 불안을 극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 알랭 드 보통의 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의

2ssue2ssue.tistory.com

2024.03.04 - [문학과 철학 이야기]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1) - 철학적 마인드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극복 방법 (1) - 철학적 마인드

불안이 가중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해결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수치심을 일으키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덤덤한 마음으로 자신의

2ssue2ssu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