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가중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해결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수치심을 일으키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덤덤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일상의 철학자라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을 통해 그 해법을 하나씩 풀어낸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첫 번째 해법은 바로 "철학"이다. 기술과학문명이 판을 치는 오늘날 철학이 과연 우리의 현실적인 지위로 인한 불안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어디 한번 그의 말을 들어보자.
결투는 왜 벌어졌을까?
웬 뜬금없는 결투 얘기를 할까 궁금한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동양에서는 결투라는 것이 낯설지만, 서양에서는 이 결투가 지위나 명예와 결부되어 있는 관행이었다. 결투라고 하는 관행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 결투로 인해 무려 수십만명의 유럽인이 목숨을 잃었다.
결투는 왜 벌어졌을까? 중요한 일 때문이었을까? 일부는 그러했지만 대부분은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명예 때문이었다. 물론 명예가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목숨만큼은 아닐텐데도 목숨을 걸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했다.
알랭 드 보통은 결투가 왜 벌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투는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 우리가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판단에 좌우될 문제는 아니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결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맞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그의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이 자리 잡는 꼴을 보느니 차리리 총을 맞거나 찔려 죽는 쪽을 택한다." 이처럼 명예 유지는 모든 성인 남성의 일차적 과제였다.
오늘날 우리는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비난의 눈으로 바라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자.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과 정신구조의 중요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취약하지 않는가.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가. 결투란 지위의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예민한 감정적 대응의 보편적인 대응 중 하나의 사례일 뿐이지 않을까?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요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 지위를 부정당할 때, 즉 경제적 실패를 하고 낮은 지위에 처하였을 때 우리는 명예 상실, 자존심 추락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철학의 필요성
이러한 명예 회복, 불안 극복에 있어서 철학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어록>(100년경)에 담긴 글을 소개한다.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에 나타났다. 바로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낮은 지위로 인한 심리적, 물질적 결과에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모욕이나 비난이나 빈곤 앞에서도 늘 차분했다.
소크라테스는 금과 보석을 가득 실은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봐라,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렉산더 대제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누더기를 입고 나무 밑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 때 무일푼이었던 디오게네스는 "옆으로 좀 비켜주시오. 해를 가리고 있잖소."라고 대답했다. 또 안티스테네스라는 철학자는 아테네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찬양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런 내가 뭘 잘못했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철학자들은 삶의 어두운 반쪽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 방법은 결투와 같은 전통적인 명예 회복 방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에 대해서도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처럼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철학자들은 "이성"이라는 상자를 통해 외부의 의견을 평가해서 그것이 참이면 받아들이고, 거짓이면 털어버린다. 이성의 규칙에 따르면, 주어진 결론은 타당성 있는 전제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된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된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라 하였다. 이성적으로 검토해 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167)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해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이처럼 철학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 없이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또한 이성을 통해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도록 돕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 보도록 이끈다.
지적인 염세주의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낮은 지위로 인해 고통받을 때, 지적인 염세주의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체계의 비뚤어진 곳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인데, 자신을 방어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태도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문제든지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샹포르는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종합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여론이 이렇게 결함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대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 등에 의존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전통이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론을 결함이 많은 의견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지위로 인한 불안을 겪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은 피곤한 욕망이 싹틀 때, 사랑의 표시를 보고 싶어 갈망할 때, 이러한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반대하거나 무시할 때,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 볼 수 있게 된다. 비난은 오직 진실한 비난일 경우에만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대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 것인지에 대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다. 염세주의 철학의 중요한 모범자였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염세주의의 장단점
물론 염세주의에도 장단점이 있다.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면에서 염세주의 철학은 유용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들어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 단점을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그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고독한 삶을 선택한다고 해서 친구를 사귀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천박한 만남이 아닌 이상적인 만남을 원하는 기준이 높은 이상주의자들이다.
나가며 : 철학자 마인드로 살기
철학자들의 가르침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외부의 인정보다는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중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우리가 염세주의 철학의 조언을 따르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우리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단속하려는) 미숙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과 결투하여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성의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때 느끼는 만족함이 더욱 튼튼히 우리를 지켜 준다.
남은 인생은 철학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깊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철학이 필요하고, 궁핍할수록 철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쇠해간다는 것이요, 궁핍해진다는 것은 경제적 실패자라는 낙인과 스스로 수치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가난에 처해도 내면이 강하고 부하다면 여전히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또한 건강하고 부한 자가 철학자가 된다면 겸손을 겸비한 위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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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알랭 드 보통은 1969년 스위스 취리히 태생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철학 석사를 받았다. 그 뒤 하버드에서 철학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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