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에 따라 대접받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일까? 오늘날 우리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는가? 오늘은 능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림자, 특히 가난에 대한 생각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나오는 "능력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가난은 자존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문제는 가난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일까, 아닐까? 또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클까, 그 반대일까?
가난(경제적 실패)을 위로하는 옛이야기
1.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성직자, 귀족, 농민으로 이루어졌던 근대 이전의 계급사회에서는 신이 계급을 그렇게 나누어 놓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세 계급을 서로 의존적인 관계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호의존 이론에 따르면, 농민은 귀족이나 성직자와 똑같이 중요하며 존엄성도 똑같았다. 엔셤 수도원장인 앨프릭은 <대화집>(1015년경)에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단연 농부라 하였다. 그 이유는 귀족이나 성직자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먹을 것을 대주는 농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기독교(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부나 가난은 도덕적 가치를 정확히 말해주는 척도가 아니었다. 예수는 가장 높은 인간이고 축복받은 인간이었지만, 지상에서 그는 가난했다. 의로움과 세속적 지위는 동일시되지 않았다.
3.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이 이야기는 대략 1754년부터 1989년 사이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이야기를 최초로 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이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권력자들이 처음부터 강탈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유지해 왔다고 주장했다.
100년 뒤 칼 마르크스는 이 이야기에 다시 힘을 보탰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는 본래부터 착취의 역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생산물을 팔아 얻는 돈보다 싼 값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며, 그 차액을 "이윤"으로 챙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언론에서는 이런 이윤을 고용주의 "모험"과 "경영"에 대한 보답이라고 찬양하지만, 마르크스는 도둑질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 주인에 대항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채무를 당당하게 받아내라고 촉구했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1.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 있다
1723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벌의 우화>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경제적 사고와는 반대로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은 부자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지출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생존을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자들이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큰 부를 추구하는 그들의 활동이 노동자들보다 사회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다. 그는 사람의 가치는 영혼이 아니라 영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큰돈을 모으고 터무니없는 사치스러운 소비를 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적으로는 악덕이지만 공적으로는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맨드빌의 주장은 18세기와 그 후의 거의 모든 위대한 경제학자와 정치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흄은 <사치론>(1752)에서 부의 추구와 과소비에 대한 지출을 옹호하는데, 그러한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보다 부를 더 창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4년 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이 이론을 더 깊이 파고들어 부자의 쓸모를 옹호하였다. 그는 부가 한정된 것이 아니라, 기업가와 상인의 노력과 야심을 통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자들의 악덕은 시장의 기능을 통해 미덕으로 바뀐다. 그들의 부에 대한 무한한 욕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이제 악당 취급을 받던 부자들은 영웅으로 묘사된다.
2.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에 따르면,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없었다. 지위는 재능보다는 혈연에 따라 주어졌기 때문에, 계급과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세습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은 <인간의 권리>(1791)에서 "문학과 과학에 세습제를 적용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세습적인 통치자는 세습적인 작가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호메로스나 유클리드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완성시키지 못한 작품을 아들이 완성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폴레옹도 통치 초기부터 '개방적 인재등용'이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앞서가는 지도자로 꼽히게 되었고, 토머스 칼라일은 부자의 자식들은 돈을 낭비하고 빈자의 자식들은 교육도 받지 못하는 것에 분개했다. 그가 원한 세상은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한 세상이었다. 바로 능력주의 사회였다.
능력주의가 주장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다.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상황에서 능력에 따라 지위와 수입의 차이가 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입을 평등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능력에 따라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며, 곤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는 능력주의 원리가 승리를 거두었다. 동시에 기회의 평등이 서양의 모든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었다.
이제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는 관련이 깊다는 믿음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제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부가 능력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에 미국의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도 돈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신이 신자들에게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모은 재산은 좋은 믿음의 증거라 말하게 되었다. 1892년 윌리엄 로런스(매사추세츠 감독파) 감독은 "결국 부는 도덕적인 인간에게만 찾아온다... 경건한 삶에는 부가 따른다."라고 까지 말하였다.
3.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함께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의 사회진화론 철학은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회진화론자들은 공정한 경쟁에서 일부가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천성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정글에서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승리할 운명을 타고난 호랑이들이다. 부자나 빈자는 모두 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부자가 되고 빈자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진화론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난과 이른 죽음이 사회 전체에는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약자는 자연의 실수이기에 소멸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 역시 불필요하며,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것은 그저 실패에 보상을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가혹한 의견에 따르면, 사회적 위계는 단계마다 거기에 속한 사람의 자질을 엄격하게 반영한다고도 말한다.
나가며: 능력주의 사회의 빛과 그림자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 덕분에 우리는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완전한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와 지위의 세습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금수저로, 누구는 흑수저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무제한적으로 열린 사회이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가 불러온 폐해는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능력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드러내는 어두운 면이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흑수저라도 자수성가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경제적 실패를 경험했을 때 우리에게 따라오는 것은 무엇인가? 능력주의 이전 사회에서 자기 발전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들은 겪지 않아도 되었던 수치심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자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대신 수치심의 옷을 입게 되었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 앞에 많은 사람들이 직면해 있다. 모든 기회가 열려 있는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에 답을 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 앞에 과연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경제적 실패와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따라오는 마음 깊은 속에서 솟아오르는 수치심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이 답답한 실패자들의 가슴에 어떤 구원의 생수를 부어줄 수 있을까? 그 궁금증이 <불안>이라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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