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년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넷이라는 열한 살 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아들의 죽음에 관해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희극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다 3년이 지난 1599년에야 비로소 슬픔에 젖은 비극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햄릿>(Hamlet)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울며 한탄하는데 3년씩이나 걸린 것일까요?
<햄릿>은 슬픔을 이겨낸 치유의 산물
앵거스 플레처는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8장.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라"에서 <햄릿>은 슬픔과 이룬 타협의 산물이요, 슬픔을 이겨낸 치유의 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슬픔을 이겨낸 치유"는 아들 햄넷이 죽은 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셰익스피어가 애써 얻어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슬픔을 이겨낸 치유"는 또한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우리들을 도와주려고 고안한 발명품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상실의 아픔"은 인간의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그리스 비극일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사별을 당한 캐릭터들이 아픔을 해결하는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음모' 형태를 띤 '복수극'입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이런 고대 그리스 비극의 문제 해결 방식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햄릿>을 새롭게 작업한다고 발표했을 때,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기상천외한 음모의 복수극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햄릿>은 음모가 전혀 없는 것 같은 플롯이었습니다.
음모가 없는 낯선 <햄릿>
셰익스피어는 화려한 복수 대신, "괴상한 기질"을 채택했습니다. 작품 속의 햄릿은 쉼 없이 지껄이고, 자신의 내적 의심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삶에 대한 혐모감을 마구 분출하는 어리석은 광기를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것을 본 다른 극작가들은 소리를 죽이고 웃었습니다. <햄릿>은 비극이 아니라 익살극이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햄릿>은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햄릿>은 관객들에게 기존 복수극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관객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들은 회복된 것처럼, 평온을 찾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음모도 없는 플롯에 어떤 힘이 있었던 것일까요?
멈춤의 효과
셰익스피어의 책상에는 아들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카르다노의 위안>이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은 현자들의 훌륭한 조언이 담긴 16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참으로 부당하게, 또 잔인하게 꺾였지만 힘겹게 이겨냈음을 기억하라."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이 조언을 달리 말하면, 자신의 죽은 아이를 기억하지 말고, 자식을 잃은 다른 사람을 기억하고, 그들이 어떻게 참고 이겨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고대의 지혜를 묵상했고, 비통한 마음을 꾹꾹 눌렀다가 몇 년 뒤 <맥베스>에서 토해 놓았습니다.
극에서 맥더프는 성이 급습을 당해 처자식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자 맬컴 왕자가 이렇게 충고합니다. "사내대장부답게 감내하시오." 그 말에 맥더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오나 슬픔을 느끼는 것도 사나이의 도리입니다.
신에게 가장 소중한 피붙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심리학자들은 "슬픔을 느끼는 것도 사나이의 도리입니다"라는 말을 치료의 서막으로 봅니다. 단순히 사별의 아픔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감정 센터와 시상의 기억 네트워크가 작동하여 우리의 비통함을 처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처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완전히 잊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비통한 마음이 점차 가라앉으며 평소의 균형 잡힌 감정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행복한 기억을 곱씹는 것 역시 상실의 아픔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행복한 기억은 뇌에 도파민 형태로 쾌감을 분출하도록 자극을 합니다. 도파민은 과거에 우리를 기쁘게 했던 좋은 일들을 더 찾도록 뇌를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옛 기억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이 과거 지향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래로 이끄는 동력이라고 합니다. 고인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면, 도파민이 분출되면서 고인을 긍정적으로 떠올릴 만한 일을 하게 됩니다. 고립된 채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우리에게 해주었던 고마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점차 기운을 차리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런 치료법이 장례식과 통합되어 고인을 향한 공개적 애도와 기념으로 권장되어 왔습니다. 핵심은 번잡한 삶을 잠시 멈추고 죽음의 순간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멈춰 있는 동안 우리는 고인과의 풀지 못한 이별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젠 곁에 없는 고인을 추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햄릿>은 이 고대 치료법의 치유 작용을 심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멈춤"을 방해했던 그리스 비극의 특징인 "음모"를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음모"는 멈춤과 정반대로 작용해서 우리 뇌를 새로운 방향으로 급하게 전환시키면서 묵상을 방해하게 됩니다. 결국 슬픔을 치료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없이 회피하는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햄릿>은 주의를 흩트리는 음모 테크놀로지를 싹 제거해 버렸습니다. 햄릿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토록 훌륭하신... 그토록 사랑하셨건만...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을..."이라고 혼자 읊조리며 고인에 대한 묵상에 천천히 몰입하는 사이, 우리도 떠나보냈던 소중한 사람을 추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 덕분에 <햄릿>은 치료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상실의 아픔 뒤 찾아오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할까?
그런데 상실의 아픔이 짧은 애도 기간 동안 완전히 치료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그 원인을 "복합적 슬픔"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합적 슬픔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해소되지 않으며, 우울증, 고립감, 분노 같은 정신적 장애를 유발하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복합적 슬픔의 원인을 앵거스 플레처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햄릿>에서도 죄책감은 햄릿의 양심을 옭아매서, 아버지를 향한 애도를 멈추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을 회복한 어머니에게 "짐승일지라도... 그보다는 오래 애도할 겁니다"라고 분노합니다. 또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향한 기억에 집착합니다.
우리 역시 고인에 대한 애도를 멈추고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것을 잘못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역시 침울함, 분노, 고립감과 같은 복합적 슬픔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 역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통해 이런 슬픔에 빠진 유족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복합적 슬픔을 해결하려면 죄책감을 치유해야 한다고 앵거스 플레처는 말합니다.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흔히 상대에게 사과하거나 선물을 줍니다. 그럼으로써 멀어진 거리를 좁힐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인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고자 조상들이 고안해 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후 선물'이라는 것인데, 고인에게 술을 따르고 분향을 하고, 무엇보다 성대하게 공개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공개 추모는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추도문, 시, 장례준비, 무덤, 조각상, 고인 명의의 기부 등 수없이 많습니다. 고인에게 삶의 한 자리를 제공하여 고인과 연대감을 느끼고 우리의 죄의식을 더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점차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햄릿은 고인을 향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모가 불충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다 우연히 극의 중간쯤, 햄릿은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릴 다른 방법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연극을 상연하는 것이었습니다. 햄릿은 고인의 전기를 대중 공연으로 펼치는 것도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아들 햄넷을 염두에 두고 <햄릿>을 쓰면서 그 점을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연극도 고인의 삶을 완벽히 재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극도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햄릿은 5막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동시에 잃은 레어티스를 만납니다. 자신보다 더 많이 잃은 레어티스의 슬픔을 보며, "나도 그런 일을 당한 처지로 미뤄볼 때, 그의 심정을 잘 알지."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연극의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플레처는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햄릿은 누군가가 자기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인정이 햄릿의 행동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햄릿은 혼자서 곱씹던 죄책감을 내려놓고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반사된 우리의 슬픔을 마주한 순간, 실제로 뇌에선 순식간에 이런 반응이 일어납니다. 거울처럼 반사된 모습은 우리가 슬픔 속에 홀로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이해해 줄 수많은 대중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이해를 통해 대중은 우리가 사별의 아픔을 이겨내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인을 충분히 기리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덜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추모의 부족함과 우리의 진의를 대중이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순간 안도감이 찾아들고, 대중과 공유하는 기억이 점점 늘어나면서 죄책감도 점차 줄어드는 것입니다.
나가며: 슬픔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하다
햄릿이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슬픔을 당한 레어티스를 만나 슬픔을 공유하면서 죄책감을 치유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슬픔과 죄책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같은 슬픔을 지닌 사람들과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아픔을 공유하고,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일상으로 이끌어 주는 마음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풀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들이 많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세월호 침몰 사건, 이태원 참사 등 아직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마음은 온전히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고인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함께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배상이든, 연대든, 사과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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