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생각이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려운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비관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비관적인 생각을 낙관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에겐 늘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비관적인 생각을 낙관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샤를 페로 이야기
극심한 비관론에 시달리는 샤를 페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관론을 치유하기 위해 조카딸의 제의를 받아 화려한 복장을 하고 4륜 마차를 탄 채 17세기 파리 시내로 들어갑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랑베르 후작부인이 운영하던 화요 살롱이었습니다. 그녀는 활달하고 개방적인 여성으로 새롭고 신나는 이야기를 장려하기 위해 살롱을 열었습니다. 페로가 방문한 날 그곳에는 후작부인의 초대를 받은 핑크색 슬리퍼를 신은 작가가 있었고, <그라시오사와 페르시넷의 이야기>라는 자신의 신작을 읊어주었습니다. 공주와 사악한 계모가 등장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황당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터무니없는 한담에 페로는 실망을 하였고, 조가딸의 이벤트에 한줄기 희망을 품었던 자신을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구절이 울려 퍼졌습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구절이 울려 퍼지는 순간 페로의 가슴은 벅차올랐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카딸이 제안한 치유법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페로의 마음을 치유해 준 그 작가는 누구였을까요? 그녀는 "마리-카트린 도느와 남작부인"이었고, 그녀의 기적 같은 치유법은 '콩 드 페(conte de fee)' 즉, '요정 이야기' 또는 '동화'였습니다.
그날 이후 페로의 머릿속에는 비관적 생각이 사라지고, 온갖 희망과 꿈이 피어났습니다. 그 뒤 페로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와 같은 영원히 지속될 자신의 요정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급기야 <신데렐라>는 1950년에 디즈니 고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파산 직전의 월트 디즈니를 구하고 페로가 화요살롱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전 세계 수십억 명의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페로 이야기의 숨겨진 가시
그러나 그러한 행복감 속에서 사람들은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페로의 장밋빛 치유법에 숨겨진 가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성의 문제'였습니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희망을 주지만,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하며, 희망이 사라진 후에는 더 큰 낙담이 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할리우드의 비평가들은 디즈니의 '인형처럼 예쁜' 공주를 비판했고, 소련은 자본주의적 환상이라 비난했고, 일간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의붓자매라고 다 발이 크고 잔인하지 않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1950년 이후의 이야기꾼들은 캐릭터를 좀 더 사실적으로, 줄거리를 좀 더 어둡게, 도덕성을 좀 더 모호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숲 속으로>, <신더>, <못생긴 의붓언니의 고백>과 같은 현대적 신데렐라가 탄생했습니다.
환상을 깨뜨린 이 동화들은 디즈니 공주가 아니어도 우리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데렐라' 부작용을 없애려던 이들의 시도는 화요 살롱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도느와 남작부인의 치유법보다 효과가 없었습니다. 도느와 남작부인의 치유법은 리얼리즘(현실주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낙관주의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의 저자 앵거스 플레처는 디즈니의 현대 비평가들과는 반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암울한 진실보다는 희망찬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적 정의의 부정적 효과
앵거스 플레처는 현대 신경과학자들이 시적 정의가 우리에게 썩 좋지 않은 때가 있음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울할 때 "선한 일은 선한 일을 낳고, 나쁜 일은 나쁜 일을 낳는다"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내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어. 그동안 헛살았던 거야. 나는 실패를 자초한 실패자야. 내가 실패자라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거야."
이런 식으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파국화(catastrophizing)'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파국화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계몽주의 논리에 따릅니다. 이런 파국적 자기비판은 우리를 비관론에 빠지게 하고, 불안과 우울증을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동화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미한 암울한 현실은 도느와 남작부인의 특별한 치유 성분을 제거하기도 하였다고 앵거스 플레처는 지적합니다. 그 특별한 성분은 무엇일까요? 그 성분을 플레처는 16세기 스트라파롤라에게서 찾습니다.
스트라파롤라가 발견한 행운의 반전
스트라파롤라가 살던 시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리나시타)가 시들해지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대포알이 나폴리를 강타하고, 스위스 용병이 밀라노 성벽을 넘나들었습니다. 스페인 기병대가 베니스의 포도밭을 짓밟아 뭉갰고, 다빈치의 걸작은 프랑스 궁수들의 표적 연습용이 되었습니다. 1553년 겨울,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암울했습니다. 리나시타는 끝났고, 차가운 눈발만 흩날렸습니다.
바로 그때 스트라파롤라가 치료법을 들고 등장했습니다. 그 치료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고대 문학을 모델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델은 희극(comedy)이라고 알려진 시끌벅쩍한 무대 오락물이었습니다.
희극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처음 고안되어 내려왔고, 익살과 말장난, 풍자, 재담, 꿈, 책략, 화해, 농담과 같은 온갖 기발한 문학 발명품으로 관객의 흥을 북돋웠습니다. 그러한 온갖 흥겨운 장치 중에서 스트라파롤라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은 "해피 엔딩"(행복한 결말)이었습니다. 해피 엔딩은 관객들에게 희망을 주는 유쾌한 사건이었습니다. 희망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스트라파롤라는 낡은 희극 원고들을 수없이 정독했고, 결국 해피 엔딩의 가장 큰 비결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운의 반전(luckey twist)'이었습니다.
행운의 반전은 이성의 법칙을 제멋대로 깨뜨리고 온갖 논리를 무너뜨리는 행운을 상정하여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이 행운의 반전은 놀랍게도 희극 작가가 아니라 비극 작가들이 고안한 것입니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야 할 것 같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은 신의 중재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신의 개입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 부르는데, 위급할 때 나타나서 돕는 신(deus)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희극 작가들은 화합이라는 우주 법칙을 강요하는 올림포스의 진지한 신(비극의 신)을 이성을 즐거움으로 마구 뒤집는 행운의 신(희극의 신)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메난드로스의 <아스피스> 끝부분에 행운의 여신이 나타나자 장례식이 휙 하는 순간에 결혼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러한 행운의 반전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 시적 정의와 대척점에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것에서만 좋은 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쁜 것에서도 임의로 좋은 게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대의 여러 연극 평론가들은 행운의 반전을 김 빠진 도피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내면의 낙천가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유익한 장치라고 호평했습니다.
내면의 낙천가에 얽힌 신경과학
21세기 신경과학자들은 좌뇌와 우뇌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신경과학자들은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우뇌는 교감신경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를 진정시키는 좌뇌는 부교감신경계와 더 밀접히 연결괴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달리 말해 우뇌는 잘못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는 반면, 좌뇌는 잘 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업 덕분에 우리 뇌는 위험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당장 아무리 비관적으로 느낄지라도, 우리 뇌는 전체적으로 볼 때, 비관론의 반은 비워 있고, 낙관론의 반은 가득 차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낙관적인 생각으로 바꾸길 원한다면, 뇌의 관점을 바꾸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간단히 뇌의 좌반구가 위로 올라가도록 머리를 몇 도 우측으로 기울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 각도만 간단히 바꿈으로써 우리의 내면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니 참 신기하면서도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신경과학자인 앵거스 플레처는 적절한 기울기를 얻기 위한 방법들이 있지만, "그냥 행운을 떠올리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마틴 셀리그먼 같은 현대 심리학자들은 "행운"을 좌뇌가 실패에 대한 원인을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임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운이 없었던 거야. 그냥 일진이 나빴어. 하지만 내일은 나한테도 행운이 찾아올 거야.'처럼 말입니다. 운에 대한 좌뇌의 강조는 회복력을 높여줍니다. 실패나 힘든 상황을 일시적 차질로 바라보도록 격려함으로써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힘차게 나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행복감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혜택은 모두 "행운의 반전"에 의해서 전달된다고 플레처는 말합니다. 반전은 우리 뇌를 파국화로 이끄는 합리적 사고에 합선을 일으켜 다르게 생각하라고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쁜 시기엔 나쁜 일이 생기는 게 논리적이지. 하지만 인생이 늘 논리적인 건 아니야. 당장 하늘에서 행운이 떨어질 수도 있어.'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낙관론은 행운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러운 도전으로 여긴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 철학자들에게 비판받았지만, 이탈리아의 리나시타(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특히 가장 암울했던 1553년 겨울, 스트라파롤라가 등장해 행운의 반전을 증폭시켜 절망에 빠진 이탈리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스트라파롤라의 좌뇌가 낙관적인 생각을 부추긴 것입니다.
행운의 반전 효과를 증폭시킨 스트라파롤라
그는 기존 희극에서 행운을 표현하고자 사용한 결혼식과 소량의 황금을, 왕실 결혼식과 무한한 황금으로 확대하였고, "행복하게 살았다"에 "오래오래"를 덧붙였습니다. 또한 왕실 신부를 불완전하고 무능하게 그려 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동화와 같은 성공에 대해 우리 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를 공주로 만든 것은 미덕이 아니라 우연이었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순전한 우연이었어.'
그는 현실성이 없다는 <신데렐라>의 찜찜한 뒷맛을 없애주는 우연이라는 희망 청량제를 분사해 줌으로써, 우뇌의 자기비판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좌뇌의 희망적 기운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스트라바롤라는 위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1553년 ≪흥겨운 밤≫이라는 작품집에 <아다만티나와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150년 뒤 서두에서 말한 도느와 남작부인 덕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그라시오사와 퍼시넷>란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공주가 사악한 계모에게 붙잡히는데, 그때 뜬금없이 왕자 요정이 나타나 그녀를 구하며, "공주, 나의 공주! 나는 그대의 것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대의 것이요!"라고 합니다. 참으로 뜬금없고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급할 때 나타나서 돕는 요정은 고대 그리스 희극에 등장하는 신적 존재로, 이성의 법칙을 깨뜨리는 페어리 엑스 마티나(fairy ex machina)입니다.
이 신과 같은 요정이 바로 도느와 남작부인의 비관론 치유 비법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처참한 상황에 빠져있지만 혹시 모를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 비법은 현대로 이어져 1925년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황금광 시대'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마지막까지 우연의 연속이 거듭됩니다.
또 여기에 감명받은 제리 시겔은 1939년 '슈퍼맨'을 출시하는데, 파멸의 위기에 처한 한 행성의 아기가 지구에 불시착하지만, 켄트 부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고 보살핌을 받은 결과 강철 인간이 됩니다. 그런 그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서술적 급선회(반전)가 주는 희망적 효과는 엄청났고, 슈퍼맨은 미국 대공황기에 가장 인기 있는 만화 캐릭터로 등극하게 됩니다. 뜻밖의 행복한 결말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선사합니다.
나가며 : 비관적 사고를 낙관적 사고로 바꾸라
동화의 반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막연한 운을 믿게 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유발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뇌적 사고는 17세기 도느와 남작부인의 동화를 해체하도록 했고, 1930년 영화제작법 및 1954년 만화 제작법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법은 "어떤 경우에도 선이 악을 이겨야 한다"는 시적 정의를 엄격히 적용하여 행운을 몰아냈습니다. 수년 뒤 위 두 법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합리적 사고에 의해 해피 엔딩이라고 하는 강력한 치유 비법이 계속적인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뇌는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우뇌만이 아니라 낙관적인 좌뇌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좌뇌는 비논리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스토리에는 절대적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삶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영역으로 생각합니다.
행운에 대해서도 좌뇌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운에 대한 믿음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회복력을 강화해 주고, 기존에 가진 좋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에는 낙관론과 비관론 중 무엇이 위험할까요? 비관론은 우리의 사망률을 두 배로 높일 수 있는 자살과 심장병, 뇌졸중의 증가율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잠재적으로 위험한 부정적 사고는 행운에 대한 우뇌의 거부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물론 지나친 낙관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뇌의 경계심과 좌뇌의 낙관론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낙관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은 비관주의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균형이 깨져서 절망적 공포 속으로 빠져들 때, 정신을 차리고 마음의 균형을 잡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때 동화의 행운이 우리에게 행운의 여신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희망을 더 많이 원한다면, 책장에 가서 동화책을 집어 들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 낙관적 사고로 뒤집는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한 권의 동화책이 행운을 얻는 기회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의 소유자, 내일의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행운에만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절망 중에 행운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어려운 현실을 지탱해 주는 비탄민이 아닐는지요?
<<참고문헌>>앵거스 플레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7장. "비관적인 생각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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