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세상이 어둡고 힘겹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육신의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현실도 떨쳐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절망을 안겨주는 육신의 눈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발명해서 천상의 지존 태양을 관측했습니다. 갈릴레이는 태양에서 특별하고 본질적인 기적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무수히 많은 얼룩이었습니다. 천상의 순수한 불, 영적 세계의 물질, 하나님의 완벽한 불멸성과 같은 특별한 것을 보기 원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마키 솔라리(macchie solari)', 즉 태양의 흑점이었습니다. 천상이 이제까지 믿었던 것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당시 존 던(John Donne)이라는 가난한 시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힘겹게 삶을 꾸려가면서도 하늘을 보며, '언젠가는 이 힘겨운 굴레를 벗어버리고 더 좋은 곳으로 올라가겠지. 언젠가는 우리의 고통이 성스러운 빛으로 다 타서 없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망원경의 등장으로 천상의 꿈마저 산산조각 나고 만 것입니다. 별들과 함께 사후세계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천상의 기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천상을 복원한 던의 문학적 역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기 수년전 던은 태양(제5원소)을 물리칠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자신의 에로틱한 서정시 <떠오르는 태양>에서 그 방법을 공개합니다. 그 서정시는 연인의 품속에서 잠든 시인의 투정으로 시작됩니다. 태양이 떠오르며 창문으로 따가운 햇살이 비치자 시인은 화를 냅니다.
분주한 늙은 바보야, 제멋대로 구는 태양아,
너는 왜 이렇게
창문 사이로, 커튼 사이로 우리를 찾아오느냐?
시인은 태양을 가려서 그 빛을 어둡게 하겠다고 위협했지만,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글거립니다. 그러자 시인은 어쩔 수 없이 후속 조치를 합니다. 베개에 몸을 던지며 태양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시인은 육신의 눈을 감아서 태양을 물리친 것입니다.
수년 뒤, 던은 이 빛바랜 서정시를 서랍에서 발견했을 대, 빛을 가리겠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에 기적 같은 힘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문학적 역설의 힘"이었습니다. 역설(paradox)은 산문 장르의 하나로, 얼음이 불보다 뜨겁다거나, 깃털이 바위보다 빨리 떨어진다거나, 밤이 낮보다 더 밝게 빛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교묘한 주장으로 논리를 뒤엎는 것입니다.
이 문학적 역설은 본래의 진실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진실에도 우리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음이 불보다 차갑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얼음이 뜨겁기도 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고, 밤은 어두우면서 또 밝기도 하다는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가리겠다는 던의 호언장담에서 똑같은 역설을 보게 됩니다. 그의 장담은 우리로 하여금 태양이 진짜 가려졌다고 믿게 하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여전히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을 감는 순간 태양이 가려졌다는 것 역시 믿게 됩니다. 눈을 감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상반된 방식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놀라운 감흥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 마치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된 두 세트의 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육신의 눈은 태양이 가려졌다고 보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태양이 여전히 밝게 빛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망원경으로 태양을 볼 때 흑점을 보고서 불완전하다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다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어떨까요? 육신의 눈으로 어떤 사람의 단점이나 죄를 보고서 죄인으로 정죄하고 낙인찍을 수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그 마음속에 있는 선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본다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것을 보는 두 세트의 눈
우리 뇌에는 두 세트의 눈이 있고, 그 두 세트의 눈은 불가능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뇌가 볼 수 있는 불가능한 것들을 신경과학자들은 "불가능한 사물(impossible object)"이라고 부릅니다.
위의 그림은 2차원 종이에는 그려질 수 있지만, 3차원 공간에선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사물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두 가능한 사물이 하나로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왼쪽 그림은 왼쪽의 가능한 삼각형과 오른쪽의 가능한 삼각형이 불가능하게 결합된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세 갈래의 가능한 포크와 두 갈래의 가능한 포크가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시각 체계는 시각 피질과 눈이라는 두 주요한 요소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 눈은 주변 사물을 스냅 촬영하듯이 봅니다. 그래서 눈이 포착한 이미지는 스냅사진처럼 평평합니다. 이 2차원의 스냅사진을 시각 피질에 보내면, 시각 피질은 스냅사진을 3차원 이미지로 병합합니다.
우리 눈이 위의 그림을 볼 때는 2차원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차원에선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각 피질은 그 사진을 완벽한 그림으로 조립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무한 루프에 빠져 가능한 절반에서 다른 가능한 절반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이 끝없는 순환은 우리의 시각 기억력에 연쇄 반응을 일으킵니다. 어떤 새로운 사물을 제대로 기록했는지 확인하고자 신경 화학적 경이를 방출합니다. 즉, '우리는 지금 신기한 사물을 보고 있어! 계속 멈춰! 계속 쳐다봐! 이걸 제대로 기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라고 뇌의 나머지 부분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때 뇌가 잠시 멈추게 되는데, 그 시간 동안 눈과 시각피질이 시간을 벌면서 사물을 계속 촬영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기억의 질을 개선해 나갑니다.
이렇게 연장된 시각적 경이가 뇌에서 특별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것을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눈 뜨기
신경해부학자인 러셀 브레인 박사는 과학의 냉정한 눈이 뇌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더라도 마음은 시로만 설명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가장 영향력 있는 신경해부학자인 스페리 박사는 "마음-뇌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마음은 사물을 보는 반면, 뇌는 행동을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령 마음이 '물'을 바라볼 때, 뇌는 '마신다'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마음에 이중 시각을 끊임없이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스페리 박사는 우리 인간에게 오른쪽과 왼쪽으로 된 두 개의 뚜렷한 의식 영역이 있는데, 그 둘을 하나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좌반구와 우반구의 다른 경험, 심지어 서로 상충되는 정신적 경험을 동시에 의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윌리엄스의 다음 시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먹었어
아이스박스에
있던 자두
그거 아마 당신이
아침에 먹으려고
아껴둔 것일 텐데
용서해 줘
자두는 맛있었어
참 달고
시원했어
마음의 눈은 자두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육신의 눈은 달고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서 마음의 눈과 육신의 눈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아무튼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두고 두 개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이라고 하는 이중 시각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겐 마음의 눈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야 사물 이면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고, 현실 너머에 있는 꿈을 바라볼 수 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며 : 결국 나에 대해 눈뜨기?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앵거스 플레처는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9장 "절망을 떨쳐내라"에서 우리의 의식을 배가시키고 경외감을 끝없이 샘솟게 하는 작품들이 주는 신비한 예술적 경험에 마음의 눈을 열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눈을 뜨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나"라는 기적을 말입니다. 얼핏 둘로 보이는 하나. 마음과 행동이 다르지만 하나로 결합된 나. 이상과 현실이 불가능하게 결합된 나. 죽은 듯 하나 살아있는 나. 좌뇌와 우뇌가 불가능하게 결합된 나.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나. 그야말로 역설로 뒤엉킨 나. 그래서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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