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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 이야기

수치심 극복과 자신만의 방식 찾기

by 박노찬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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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자아를 좀 먹는 병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은 중국 문학 속에 숨겨진 테크놀로지를 통해 그 비법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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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극복과 자신만의 방식 찾기

수치심은 심리적 회초리?

18세기 초, 중국에 조설근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시험을 앞두고 '공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들여다봐도 머리에 남는 건 수치심뿐이었습니다. 수치심은 공자의 대표적 가르침 중 하나였습니다. 공자의 훌륭한 제자인 맹자는 "수치를 모르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가르친 치(恥; 부끄러울 치)는 일종의 심리적 회초리였습니다. 도(道)를 어겼을 때 치(恥)를 느껴 바른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설근에게 공자의 회초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부가 안 될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고, 어머니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볼 때도 치를 느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설근의 수치는 그를 더 인간답게 성장하도록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 감정이 너무 커져서 그는 결국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책을 덮고 서당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삼킬 망각의 구멍을 찾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구멍 대신 빛바랜 고문서를 발견합니다. 바로 장자의 <원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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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툰 이야기

세상의 한가운데 원툰이 살고 있었다. 원툰에겐 북쪽 황제와 남쪽 황제라는 두 이웃이 있었다. 원툰은 늘 두 황제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두 황제는 원툰의 친절에 보답하고자 뜻을 모았다. "우리는 머리에 구멍이 일곱 개씩 있소... 하지만 불쌍한 원툰에겐 구멍이 하나도 없소. 그러니 우리가 구멍을 좀 내줘야 하오." 두 황제는 송곳으로 날마다 원툰의 머리에 구멍을 하나씩 뚫었다. 그런데 일곱째 날, 원툰이 죽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요? 장자는 공자보다 한 세기 후 정도인 전국시대 인물로 추정됩니다. 장자는 공자의 한 가지 영원한 도(道;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수치심을 느끼면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심리적 회초리도 부자연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연못의 비단잉어와 하늘의 참새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잉어와 참새는 같지 않아! 그들은 각자의 방식이 있고, 한쪽 방식이 다른 쪽에게 좋진 않아. 잉어가 참새의 방식을 좇으려 하면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없을 테고, 참새가 잉어의 방식을 따르려 하면 물에 빠져 죽을 테지.' 결국 장자는 인생에는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원툰 이야기>를 쓰게 된 것입니다. 두 황제는 자신들이 좋게 여긴 방식으로 원툰에게 선을 베풀려 하였지만, 그것이 원툰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중국 고대 사상에는 음양 사상이 있습니다. 음은 어두운 밤을, 양은 낮을 뜻합니다. 이 둘은 합쳐져 자연의 더 큰 이원성을 상징합니다. 밤이 낮과 쌍을 이루듯, 세상 만물도 상반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여름은 겨울과 연결되고, 매끄러운 것은 거친 것과 연결되며, 깨어남은 꿈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공자의 추종자들은 각각의 결합에서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자는 음과 양 둘 다를 좋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이원성에 대한 깨달음은 공자의 절대적 하나(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별적 방식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습니다. 결국 장자의 <원툰 이야기>는 음과 양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원툰이 황제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죽을 이유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원툰 이야기>에는 허점이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넘어 두 황제를 나쁜 사람들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떤 길은 좋고 어떤 길은 나쁘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장자는 <원툰 이야기>의 허점을 바로잡는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호접몽(나비의 꿈)

나, 장자는 어느 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기분 좋게 날다 보니 내가 장자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눈을 뜨니, 나는 다시 나 자신, 진짜 장자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장자가 나비로 변하는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장자로 변하는 꿈을 꾸었을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장자와 나비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이를 일러 만물의 변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호접몽>(나비의 꿈)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쁜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르지만 똑같이 긍정적인 두 가지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나비 꿈을 꾸는 장자이기도 하고, 장자 꿈을 꾸는 나비이기도 합니다. 둘 다 즐겁고 행복합니다.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변한다고 해서 그 변화가 진보나 퇴보는 아닙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삶의 양면(이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원툰 이야기>를 통해 절대적 하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며, <호접몽>을 통해 이원성의 수용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앵거스 플레처는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10장. "자아수용을 달성하라"에서 이 이야기들을 "자아수용(self-acceptance)"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자아수용(self-acceptance)

앵거스 플레처는 수치심에 의해 자아수용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또 다른 주요 감정으로는 죄책감과 자부심이 있습니다. 현대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주요 감정들이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강화한다고 말합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공동체가 나쁘게 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반면, 자부심은 공동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격려합니다. 
 
현대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독특한 생각이나 관심사, 특이한 재주 같은 개인적 특성에 대한 자부심은 우리의 기분을 개선하고 회복력을 높이며, 협력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자신의 존재 방식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다른 방식을 위협으로 여기는 성향이 줄고, 타인의 다른 측면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수치심은 거의 언제나 해로워서, 낮은 자존감, 약물 남용, 우울증, 불안, 서툰 인간관계 등을 불러옵니다. 수치심은 죄책감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우리 뇌를 좀먹는다고 합니다. 죄책감이 우리의 외부 행동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수치심은 우리의 본성 자체를 의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못생겼어. 나는 멍청해. 나는 쓸모없어.'와 같이 우리 자신의 항구적인 모습에 혐오감을 갖게 만듭니다. 
 

수치심을 줄이는 방법

앵거스 플레처는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수치심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우리의 내면목록을 더 확장해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의 범위를 늘리면 된다고 합니다. 내면 목록 확장을 위한 간단한 방법은, 우리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폭넓게 어울리는 것입니다. 어울리는 사람들의 규범이 다양할수록 우리 뇌는 자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린 조설근은 어떻게 수치심을 덜어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장자의 <호접몽>을 읽고 장자의 삶과 나비의 삶이 모두 행복하고 좋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면의 규범 목록을 확장 할 수 있었고, 수치심을 일으키던 자기 판단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앵거스 플레처는 우리가 <호접몽>과 같은 짧은 이야기 하나를 읽었다고 해로운 수치심을 훌훌 털어내는 것은 힘들다고 말합니다. 완전한 자아수용을 달성하려면, 내측전두이랑이 다양한 규범을 흡수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문학 작품에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자는 훗날 <장자>로 알려진 책에 수십 편의 이야기를 남겨 이런 확장된 문학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수치심을 해결할 도구로 <장자>를 추천하는 것입니다. 
장자의 이런 이야기 형식은 그전까지는 없던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고 신기하다는 뜻의 '노블(novel)'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결국 플레처는 중국 소설의 창시자로 장자를 꼽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중국 소설을 처음 고안한 사람은 <삼국지연의(삼국지)>를 쓴 나관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조설근은 <호접몽>에 이어 <삼국지>와 또 비슷한 시기에 나온 <수호전>을 몰입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변화를 강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삼국지>와 <수호전>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에 연민을 느꼈고, 특히 <수호전>에 가미된 외설적 요소에 관심이 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외설적 요소는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점을 조설근은 주목했다고 합니다. 원래 <삼국지>와 <수호전>은 전적으로 질서와 혼란 사이의 갈등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로서 혼란보다는 질서를 따르도록 촉구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음보다 양을 더 고양시키고 우리 뇌에 절대적 하나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홍루몽

조설근은 이러한 <삼국지>와 <수호전>의 문학 테크놀로지를 변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웅이나 악한 대신 각자의 방식을 따르는 복잡한 인물을 수십 명 등장시켜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홍루몽>을 완성하였습니다. 조설근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스타일을 향한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줍니다. <홍루몽>의 다양한 캐릭터들로 인해 우리 내면의 규범 목록이 부드럽게 확장됩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남으로써 독특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조설근은 한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를 꿈꾸는 것을 넘어, 한 세상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식으로 그려냅니다. 첫 번째 세상은 청 왕조이고, 두 번째 세상은 환상의 나라입니다. 소설의 첫 장에서 청나라의 한 사내가 환상의 나라에 대한 꿈을 꿉니다. 그 꿈에서 신령한 물건이 청나라의 한 사내로 태어나 꿈꾸던 삶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어지는 장에서도 여러 캐릭터들이 다른 세상에서 깨어납니다.
 
두 세상은 각자의 뚜렷한 방식에서 진짜로 느껴집니다. 환상의 나라는 청나라 백성들의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청 왕조는 온갖 환상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랑을 느끼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두 세상은 모두 진짜입니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서 한 세상의 꿈꾸는 자에서 다른 세상의 꿈꾸는 자로 왔다 갔다 합니다. 마치 한 소년이 두 소녀와 똑같이 사랑에 빠진 등변 삼각관계와 같습니다. 일반적인 삼각관계에서는 두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둘 중 한 소녀만 그에게 맞는 짝입니다. 그러나 등변 삼각관계에선 둘 다 그에게 맞는 짝입니다. 한 소녀는 그의 음이고, 다른 소녀는 그의 양입니다. 
 

나가며: 자신만의 방식 찾기

앵거스 플레처는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나비처럼 훨훨 날라고 합니다. 밤과 낮으로 된 이 세상을 떠나 다른 꿈에서 깨어나라고 합니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는 것, 참 멋진 말입니다. 세상의 규범이 요구하는 정형화된 삶이 답답하게 느껴지신다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앵거스 플레처는 즉흥적인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합니다. 굳이 <홍루몽>을 읽을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냥 즐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교나 사회적 관념 등에 따라 요구받는 사회적 규범이 있습니다. 또는 부모나 친구들에 의해 요구받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또 어떤 것은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습니다. 세상의 요구와 나의 자아의 요구가 다를 때 우리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수치심에 빠져 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 발견의 길을 나서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신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름을 그름으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름을 개성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남과 다른 나의 독특한 모습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세상의 아름다움에 일점일획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과 똑같은 나라면 존재의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대다수의 가치를 공유하지만 자신만의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 아닐까요? 
 
아래에 수치심을 낮추고 자아수용을 증진시켜 줄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 영화 '카사블랑카', 1942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치마만다 은고치 아디치에, <아메리카나>
●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 영화 '토탈 리콜', 1990년
● 데이비드 미첼, <클라우드 아틀라스>
● 영화 '미스터 노바디',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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