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현재의 삶은 만족스럽습니까? 아니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하던 일을 더 열심히 하면 될까요? 약간의 개선은 이룰 수 있어도,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큰 변화는 혁신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혁신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혁신은 원래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던 단어였다
현대사회에서 혁신이라는 단어는 매우 긍정적이고, 가치 있고, 멋진 단어로 불립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혁신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의 저자 앵거스 플레처는, 예전에 혁신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탄이 천국의 위계질서에 도전한 사건이나, 하와(이브)가 에덴동산의 금지된 실과를 따먹은 사건 등을 혁신적 행동으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혁신가들'이라 함은 곧 강탈자, 신성모독자, 하나님에게 맞서는 영혼을 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혁신의 기본적 성격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혁신은 본래 기존의 전통과 관습,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득권의 입장에서는 혁신이 매우 불경스럽고 껄끄러운 것이 됩니다. 그래서 혁신은 항상 초기에 부정적 비판과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혁신가들은 이러한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창적인 생각을 밀어붙여 결국 세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반대로 남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쉽게 혁신을 이루지 못합니다. 비판을 감수하는 자만이 혁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도 처음엔 이단으로 찍혔었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 역시 당시에는 이단으로 찍혔었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보니,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6세기에 "이탈리아의 통일과 번영을 꿈꾸며 새로운 정치사상을 모색한 정치사상가"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그가 <군주론>에서 했던 유명한 말을 인용해 봅니다.
“군주 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게 된다.”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의 이런 말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땅은 분열과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나라의 구심점이 없이 여러 분파로 갈라져 대립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정치체제도 군주국, 공화국, 신정정치체제 등 다양하여 "하나의 정부와 하나의 체제를 갖춘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에 대한 갈망이 높은 시대였습니다.
한편, 당시는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1453년 비탄진 제국 멸망 이후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학자와 기술자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망명했고, 이를 토대로 고대의 유산을 재발견하고 학술과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그에 힘입어 초기 자본주의와 시민계급이 등장하는 등 근대정신이 싹트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시대가 낳은 사람으로서 그 시대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군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공부한 인문학을 통해 나름대로의 '대포'를 만들어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낡은 사상과 관습을 부숴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당시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통일 국가를 세우고자 자신의 인문학적 사상을 <군주론>에 담아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오히려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그가 주장한 군주의 덕목은 관용과 후덕함 보다는 인색해야 하며,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주어야 하며, 약속은 때로 어길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책들은 오랫동안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고, 종교개혁자들도 그를 악마라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마키아벨리즘"이라 말할 때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새로운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악행도 서슴지 말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는 애국심의 발로와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피렌체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에는 "어떤 묘비명도 이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신성모독자요 악마로 불리던 마키아벨리를 오늘날에는 근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선구자로 보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교회가 강조하던 금욕적이고 정태적인 도덕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목적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신을 해방시킨 책들
이러한 파격적인 <군주론>을 설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마키아벨리는 말년에 별 볼 일 없는 하급 공무원으로 삶의 후반을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야망이 꺾인 그는 무슨 즐거움으로 삶을 지탱해 나갔을까요? 그는 낮에는 소박한 차림으로 출근하여 하찮은 일을 하다가, 퇴근 후에는 가장 좋은 정장을 꺼내 입고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밤의 고요 속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수천 년 전의 대가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해 주는 힘이자 정신적 해방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단테의 <희곡>(Comedy)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주론>을 쓰던 해에 친구에게 보내는 은밀한 편지에서 자신의 주머니엔 단테의 <희곡>이 들어있다고 했답니다. 단테는 마키아벨리보다 2세기 전에 피렌체로 망명한 작가였습니다. 단테는 당시 여러 파벌 중 화이트 굴프에 속했는데, 강력한 파벌인 블랙 굴프에 의해 쫓겨나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놀라운 작품들을 썼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얼핏 보면 정통 서사시였지만, 그 안에는 정신을 해방시키는 발명품이 은밀히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마키아벨리도 그의 영향을 받아 자유롭게 생각하는 영혼이 된 것입니다.
온갖 알레고리로 쓰인 단테의 <신곡>
단테의 게릴라 작전이 성공하려면 당시 유럽 최고 권력자였던 가톨릭교회가 의심하지 못할 문학 스타일로 위장해야 했는데, 그가 사용한 기법이 바로 "알레고리"였습니다. 알레고리는 '달리 말하기'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로 '우유, 우의, 풍유'라 불리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에 은밀히 빗대어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이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인물이나 행위, 배경 등의 표면적 의미와 내면적 의미 모두를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알레고리의 문제점은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그 해석의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수많은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알레고리가 중세 교회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온갖 영역에 알레고리를 활용해 교회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일 미사의 여러 의식들, 사제복의 장식품과 성전 건축물의 세부적인 것에까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오늘날 단테의 <희곡>은 신성한 책으로 받아들여져 <신곡>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많은 이교도 신화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알레고리에 이교도 신화를 채용한 것입니다.
<신곡 지옥편>은 "정의가 나를 세웠노라"라고 적힌 문을 통과하면 지옥의 아홉 개 원을 마주하게 되고, 원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형벌이 등장하면서 정의를 더 정교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타는 벽이 등장하고 그 벽에서 세 괴물이 피로 물든 턱을 벌리고 "오 메두사여, 저 침입자를 돌로 만들어라!"라고 부르짖습니다.
거룩한 성경의 알레고리에 갑자기 웬 메두사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메두사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메두사는 단테가 젊은 시절 오비디우스의 <변신>을 읽다가 알아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라고 앵거스 플레처는 말합니다.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했는데, 머리카락이 모두 뱀으로 되어 있고 너무나 무서워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기독적인 허구가 기독교적 서사시 <지옥편>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메두사 외에도 <지옥편>에는 제 살을 갉아먹는 미노타우로스,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무리, 가시를 먹고사는 하피 무리들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신성한 종교적 감정을 이상한 기분으로 만듭니다.
이상한 기분과 그 신경과학
우리 뇌에서 어떤 물체가 눈에 확 띄는 방식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낯선 환경에서 익숙한 물체는 눈에 잘 띈다고 합니다. 외국을 갔는데 고향 땅에 있는 것이 있다면 놀라면서 경이감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반대로 익숙한 환경에서 낯선 물체가 눈에 잘 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아주 다른 감정인 파라노이아(paranoia: 망상증, 편집증)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파라노이아는 우리 뇌의 위협 탐지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데, 주변에서 어떤 눈에 보이는 낯선 움직임이 포착되거나, 또는 보이지는 않지만 숨겨진 위험이 감지되는 상황에서 경계경보가 발령되는 것입니다. 우리 뇌는 일상적인 환경 패턴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 경계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곡 지옥편>에서 느껴지는 파라노이아
단테는 성직자와 다른 방식으로 알레고리를 사용했습니다. 성직자는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반면, 시인은 숨겨진 진실을 감추기 위해 알레고리를 사용하는데, 단테는 시인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알레고리는 계시의 경이로움을 창조한 반면, 시의 알레고리는 표면 아래 뭔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 즉 파라노이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우리가 메두사를 볼 때 경험하는 것 역시 파라노이아입니다. 메두사는 익숙한 기독교 환경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우리 뇌는 위협 탐지 네트워크가 작동하면서 '이교도 신화가 지옥에 왜 등장하지?'라는 궁금증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곡 지옥편>에는 지옥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베르길리우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기독교도가 아닙니다. 그는 <아이네이스>라는 서사시를 쓴 이교도 작가입니다. 단테는 그의 입을 빌려 파라노이아를 고조시킵니다.
"오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여,
낯선 시구의 베일 아래
숨겨진 교리를 찾으라."
단테는 왜 낯선 이교도를 작품 속에 들여와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일까요? 앵거스 플레처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합니다. "<신곡 지옥편>이 공개하지도 않을 비밀을 암시한 이유는, 단테가 비밀 자체보다 비밀을 찾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단테는 훗날 전제 군주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내 시는,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정의가 우리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혹은 보상하는지 보여주는 알레고리입니다."
이 말에서 단테의 강조점은 정의가 아니라 '자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처벌받을 수도, 보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앵거스 플레처가 아닌 블로그 글을 쓰고 있는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자면, 단테는 낯선 이교도를 자신의 기독교적 작품 속에 등장시켜 우리 뇌로 하여금 병적인 경계심을 유발해 '이거 좀 이상한데, 진실이 뭐지?'라고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양면적 효과를 발휘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지옥의 형벌의 끔찍함을 느끼고 정말 지옥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함으로써 진실된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입니다. 기존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과연 그것이 진짜 진리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오면서 : 어떻게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단테의 의도는 우리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단테의 <희곡>이 왜 <신곡>이 되었는지 저는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수많은 이단적 요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비록 이교도적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지옥의 무서움을 유발해 결국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알레고리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는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케아벨리식 시도라 보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 강화와 신앙심 고취라는 목적을 위해 이교도 신화를 이용한 것입니다. 현대 설교에도 이런 요소는 많이 등장합니다. 비기독교적인 수많은 예화를 통해 설교의 주제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경우들이 정말 많지 않습니까?
알레고리라고 하는 기술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쉽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알레고리는 쉽게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알레고리를 통해 당대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교의 빗나간 교리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으로 유대교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그럼으로써 안식일의 진짜 목적을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행위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병에서 치유받게 하는 것이 그에게 진정한 안식이며, 병자는 곧 죄인의 증거였기에 병을 고치심으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짜 예언자들이 수백 년간 예언해 온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권위에 부딪혀 십자가형을 당했지만, 그것 역시 놀라운 반전을 통한 당신이 진짜 메시아임을 증명하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결국 부활이라는 극적 반전을 통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알레고리적 가르침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또,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가 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의 빈무덤은 까무러칠 사건이었고, 그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유대교의 기존 교리로부터 정신의 해방을 받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예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을 받을 때 자신도 붙잡혀 죽을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혀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이 낯선 부활을 목격한 뒤엔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정신이 열려 진짜 메시아를 발견했고, 진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신이 해방되어 새로운 깨달음이 올 때 우리의 삶에 혁신이 일어납니다. 단테는 이교도의 낯선 소재를 통해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독교적 메시지를 <신곡> 안에 담았습니다. 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사상을 펼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밝히면 이단아로 찍힐 것이 뻔했기에 그는 알레고리라는 명분으로 사상검열을 피했던 것입니다. 마카아벨리의 정신을 해방시켜 준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얘기했지만, 그것은 고대의 신화들과 단테의 <신곡>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정신적 해방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파라노이아입니다. 우리 뇌가 깜짝 놀라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과연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낳게 하고, '아하 그렇구나!'라는 깨달음을 주는 놀라운 책들이 아닐까요?
파라노이아를 일으키는 단테의 발명품은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수많은 결과물들이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도서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앵거스 플레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제6장. "정신을 해방시켜라"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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