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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 이야기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정체와 극복 방법

by 박노찬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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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르시시즘에 빠진 적이 있으신가요? 인간은 어느 정도 자기애(自己愛)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한 수준의 자기애는 자존감 내지는 자부심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자기애)

 

자신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정신분석학 용어

두산백과는 나르시시즘을 "자신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자기애라고 번역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비도는 정신분석학 용어로써 성본능 또는 성충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자신에게서 성적 충동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자기와 같은 이름의 꽃인 나르키소스, 즉 수선화가 된 미소년 나르키소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미소년의 이름과 연관 지어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네케가 1889년에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이성의 육체를 보듯 하고, 또는 스스로를 애무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하여 황홀감을 느낀다면 나르시시즘을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용어로 사용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기의 육체나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성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쏠려 있는 상태를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리비도가 유아기 때에는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 상태를 프로이트는 1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였으며, 나중에 성장하면서 리비도는 자기 자신을 떠나 외부의 대상(어머니나 이성)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애정 생활이 위기에 직면하여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되면, 유아기 때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이 2차적 나르시시즘입니다. 프로이트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이나 파라노이아(편집증; 망상증: 대상에게 적의가 숨어 있다고 판단하여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증상)의 경우는 나르시시즘의 극단적인 예라고 하였습니다. 

 

나르시시즘

피트 데이비스가 말하는 나르시시즘

한편 <<전념>>의 저자 피트 데이비스는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서서히 자아를 확립하고 자아존중감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내적 자아와 겉껍데기가 둘로 분리될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진정한 자아 대신 껍데기를 쌓아 올릴 때 뿌리를 내린다. 사실 알고 보면 나르시시스트는 과장되게 부풀린 껍데기에 둘러싸인 약한 사람들이다."

 

그는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내면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남들이 그것을 알아차릴까 봐 전전긍긍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부풀려진 껍데기에 금이 가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내면이 약할수록 두려움이 커지고, 두려움이 커질수록 점점 더 병적으로 껍데기를 부풀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신의 겉껍데기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나르시시즘 극복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르시시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피트 데이비스는 집착의 대상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콜라를 적게 마시는 게 목표라면 '콜라를 적게 마셔야지'라고 생각하는 대신 '물을 많이 마셔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쁜 상황을 무작정 없애려고 하는 것보다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관심의 대상을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로 바꾸고 그것에 헌신(전념)하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피트 데이비스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돈이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고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것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돈을 목적으로 블로그를 한다면 저는 저의 내면의 관심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관심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고,  저의 내면이 아닌 껍데기를 키우는데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커진 껍데기는 결국 금이 가서 무너질 것이고,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내면을 키우기 위한 블로그 글쓰기를 하고자 합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찾아볼 가치가 있는 퀄리티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제가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외적 가치보다 내적 가치에 집중하고, 내가 아닌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나르시시즘은 우리 안에 똬리를 틀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끔찍한 나르시시스트입니다

나를 돌아보니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그 어떤 곳에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높은 성벽을 쌓았나 봅니다. 이 역시 나의 자아를 끔찍이도 사랑한 나르시시즘이 아니었나 고백합니다. 나는 죽어 없어져야 할 못난 자아를 끔찍이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이제 조금씩 세상을 향한 제 마음의 문을 열어나가겠습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 [전념](피트 데이비스 저, 상상스퀘어,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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