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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 이야기

상처 입고 목마른 영혼을 위한 [리디밍 러브]

by 박노찬 202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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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고 목마른 영혼에게

상처 입지 않은 영혼이 있을까? 세상에 상처 입고, 가족, 친구에게 상처 입고, 무심코 던진 타인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또한 목마르다. 진정한 사랑에 목마르다.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 모습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줄 조건 없는 사랑에 목마르다. 
 
상처 입지 않는 영혼이 없고, 목마르지 않은 영혼이 없기에, "상처 입고 목마른 영혼에게" 바친다는 <리디밍 러브>의 헌사는 책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프랜신 리버스 Francine Rivers

당대 최고의 소설가. 미국 최고의 로맨스 소설에 주는 리타 상을 3회 연속 수상하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렸지만, 삶의 방향에 대한 오랜 방황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기독교로 회심. 그러나 그 후에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러던 그녀가 마침내 한 여자를 끝없이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 <리디밍 러브>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평단과 독자로부터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크리스티 상과 ECPA 골드 메달리언 상 등을 수상한다. 
 
그녀는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용당하고 학대받는 이들,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이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펼쳐낸다. 그녀는 참된 사랑, 삶의 진정한 의미,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집필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도서사진-리디밍러브
리디밍 러브, 프랜신 리버스 저

리디밍 러브 Redeeming Love

"리디밍 러브"가 뭘까? 어떤 사랑을 뜻하는 말일까? 사전적 정의부터 찾아보고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리디밍(redeeming)은 "(결점이나 실망 등을) 보충하는, 벌충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동사는 redeem으로 "(결함 등을) 보완하다, 벌충하다, 상쇄하다", "(실수 등을) 만회하다", "(죄악으로부터) 구하다, 구원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책 제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니, 이 책은 단순한 남녀간의 로맨스 소설 이상의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과연 프랜신 리버스는 어떤 사랑을 그려낼까? 더욱이 상처받고 목마른 영혼을 위한 소설이라 하였으니, 과연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고, 어떻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사랑이 없는 사랑의 여신 엔젤

엔젤이 된 사라. 사라는 본명. 엔젤은 매음굴 포주가 붙여준 애칭. 사람들은 엔젤을 '사랑의 여신'이라 부르며, 그녀에게서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엔젤 역시 그들이 찾는 위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친부, 엄마, 외조부모, 자신을 위탁받은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8살의 나이에 매음굴로 팔려간다. 갖은 성적 학대에 시달리며, 남자를 받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배경은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시대. 일확천금의 꿈을 품은 부랑자와 귀족,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과 파산자들이 뒤엉켜 있는 도시 페어러다이스. 그곳은 적나라한 악행과 탐욕, 고독과 거대한 환상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온갖 종류의 버림받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썩은 희망이 만들어 낸 연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엔젤은 더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체면을 접어 버렸다. 자신의 삶을 증오했고, 다른 이들을 혐오했다. 자신의 지독한 무력함도 증오했고, 무엇보다 사정없이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남자들이 싫었다. 그들에게 엔젤은 갈망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들은 기꺼이 값을 치르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엔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감정은 증오가 아니라,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권태였다. 18살이 된 엔젤에게 삶은 더 이상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는 권태 그 자체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대로 살거나,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만 두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번번이 실패했다. 

미가엘 호세아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미가엘 호세아라는 사람이 나타나 청혼을 한다. 그는 자신의 신붓감을 놓고 기도해오고 있었다. 엔젤을 보는 순간, 자신이 결혼할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여, 이건 제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래도 그는 순종한다. 매일매일 그녀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며 그를 내친다. 
 
"어찌하여 저에게 매춘부와 결혼하라고 하십니까" 신의 대답이 들려온다. "사랑하는 자여, 내 뜻을 행하라. 내가 너를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고 네 발을 반석 위에 세워 그 걸음을 견고케 해 주었도다. 엔젤을 구하러 돌아가라." 미가엘은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바보입니다. 바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하지만 그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거겠죠, 주님? 제가 당신의뜻을 따르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겠죠?" "이렇게 해서 어떤 선하신 뜻을 이루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돌아가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신는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한다. 
 
끝내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금을 주고 죽기 일보 직전의 엔젤을 구해온다. 미가엘은 엔젤에게 속삭인다. "당신의 삶을 온기와 빛깔로 채워 주고 싶소. 빛으로 가득 채워 주고 싶소." 미가엘은 그의 삶의 일부분이 될 여자를 원했다. 그러나 엔젤의 마음속에는 똬리를 틀고 있는 결핍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 미가엘을 향해 열리지 않았다. 
 
엘젤의 마음 속에는 두 마음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에게서 도망쳐, 엔젤. 지금 당장 도망쳐.' "그대로있으라, 사랑하는 자여." 엔젤의 마음은 소리 없는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감정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편으론 오래전에 버렸던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엔젤 스스로 그 희망의 불씨를 꺼 버리려 하고 있었다. 버림받은 삶에 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이, 희망은 잔인한 것이라고, 굶주린 아이 앞에 풍기는 맛난 음식 냄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아주 작은 불씨가 있음을 느꼈다. 

속죄와 치유의 길

그러나 그런 희망을 붙들기엔 자신이 너무 더럽다고 느낀다. 그래서 미가엘 곁을 도망쳐 나온다. 그것이 그를 위한 길이라고. 그러나 미가엘은 또다시 엔젤을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엔젤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해보려고, 혹시나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을까 자갈로 온 몸을 빡빡 긁어낸다. 살갗이 벗져지기까지. 
 
나아가 그녀는 고된 노동으로 자신의 잘못을 변상하려 한다.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 속죄를 위한 고행을 택한다. 미가엘이 원하는 것은 사랑뿐인데, 엔젤은 마치 노예처럼 일하는 것으로 미가엘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 
 
찢기고 상한 영혼을 고치실 이는 하나님뿐이다. 하지만 엔젤은 하나님을 거부한다. 친부가 자신을 증오하고 죽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처 입은 영혼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박한 심령의 엄마를 차갑게 거절한 신부를 본 어린 엔젤에게 어떻게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탄이나 진배 없는 남자에게 성의 노예로 팔려, 온갖 남자들에게 이용 당하고, 그 일에 대한 온갖 비난은 혼자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어찌 믿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엔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올렸다. 스스로 강한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신의 의지와 삶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엔젤은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미가엘이라도 말이다.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

"라합과 룻, 밧세바, 마리아도 발을 디뎠으니, 당신에게도 발 디딜 자리가 분명 있을 거요." 미가엘은 엔젤과 씨름을 한다. "라합은 창녀였소. 룻은 공공연한 타작마당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의 잠자리에 몰래 들어갔던 여자고, 밧세바는 남편 몰래 부정을 저질렀지... 마리아는 정혼자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잉태했소." "모두 예수님의 가계에 있는 여자들이오."
 
한편, 어둠의 소리는 '미가엘이 너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불어넣는 거야. 희망이란 목숨을 잃게 될 정도로 치명적이지.' 이런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엔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퇴각 명령을 내리고 다시 벽을 높이 쌓아 올린다.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봄기운에 땅이 깨어나듯, 엘젤의 마음속에도 뭔가 이상한 것이 흩뿌려져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엔젤은 미가엘이 자신의 모든 바람을 이뤄 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랑은 상처를 낫게 해 주지 아프게 하지 않소. 사랑은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것이 아니오." 미가엘의 말이다.
"미가엘, 당신 때문에 나는 자꾸 희망을 품게 돼요." 엔젤의 고백이 기쁘기만 하다. 이제 시작이다. 엔젤은 마음을 갉아먹는 두려움과 싸우기 시작했다. 미가엘이 답한다. "난 그저 도구일 뿐이오, 내 사랑. 당신의 구세주는 내가 아니라오." 
 
이제 엔젤은 미가엘 같은 남자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또한 스스로가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한없이 겸손해졌다. 이제 다시는 미가엘을 힘들게 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달콤한 향기가 어두운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 엔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피어올랐다. "나니라!" 
 

다시 태어난 사라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이젠 진정으로 미가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미가엘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었다. 매음굴의 포주에게서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미가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결국 그를 위해 떠나기를 결정한다. 자신이 떠나면 미가엘을 좋아하는 이웃집 처녀 미리암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미가엘도 엔젤이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번에는 잡지도 찾으러 가지도 않겠다고 결심한다. 왜? 스스로 돌아오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결국 엔젤은 길을 떠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시 매음굴의 포주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였다. 다행히 요나단이라는 신앙인 은행가의 도움으로 매음굴에서 극적인 탈출을 하고, 그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교회에서 목사의 콜링에 응답하여 예수를 구주로 모셔 들인다. 수개월 뒤 그녀는 막달레나의 집이라는 갱생센터를 세워,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모아 재활훈련을 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미가엘의 매제가 찾아와 미가엘 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한다. 갈등 끝에 결국 그녀는 미가엘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다시 감정에 치여 걸음을 멈추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냉담한 마음, 두려움, 불안함은 이제 끝이라고 하면서. 
 
"사라"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미가엘에게 줄 진정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엔젤 자신이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만난 미가엘과 엔젤. 그들은 에덴을 맛본다. 아.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종착역이다. 미가엘과 엔젤만이 아니라, 우리를 에덴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프랜신 리버스는 860쪽이 넘는 기나긴 글을 써야만 했다. 우리의 결점과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 주신다. 
 
끝없이 도망치고, 끝없이 배신하는 엔젤을 끝없이 사랑하는 호세아를 통해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가 자신의 모든 금을 주고 엔젤을 사 오듯, 자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우리의 목숨 값으로 내어주면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우리의 반복된 죄, 좌절, 절망, 끝없는 우리의 배신, 우리의 실패, 결점, 부도덕, 모든 거짓된 삶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지치고 않고 변함도 없다는 것을 알리기 원하신다. 
 
우리가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앞에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이다. 부끄러운 모습, 범죄 한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피차 죄인인 처지에 서로 비난한들 상처만 더할 뿐이다. 처음에 미가엘 호세아가 부르짖은 것처럼, "주여 이건 제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전까지 저에겐 평안이 없겠지요. 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당신 뜻대로 하겠습니다."
 
프랜신 리버스는 다음의 말로 소설을 갈무리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사랑하여 주시듯이 서로 사랑하라. 담대하게, 결연하게,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무슨 일이 닥쳐와도 사랑하라. 약해지지 말지라. 어둠에 맞서 싸우라. 그리고 또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다시 살아나는 길이다.'
 

에필로그에 대한 묵상

에필로그는 그야말로 동화와 같은 결말이다. 사라와 미가엘은 7주년 결혼기념일에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 스데반을 얻는다. 그 뒤 세명의 자녀를 더 낳고 행복하게 오랫동안 산다. 성경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로 불임 여인이었다. 그러나 90세의 나이에 이삭을 낳고, 열국의 어미가 되었다.
 
성경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프랜신 리버스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불임 여인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임이라는 것, 여인으로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가장 절망스러운 일 중의 하나이다. 불임은 여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내가 처한 상황이 가장 처참하고 가장 슬프고, 가장 절망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 삶은 지옥이라고 말한다. 그냥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하나님은 과연 있는 것이냐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자신은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 이런 생각은 스스로를 좌절에 빠뜨리고, 스스로 상처를 키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높은 장벽을 세우고 그 안에 들어가 안주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벽을 깨트리려고 하신다.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가오신다. 마음속의 세미한 음성으로,  또는 타인의 모습으로.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우리의 마음에 다시금 천국을 창조하시기 위해서다. 에덴은 어디에 있는가? 창세기에 존재했으나 천사가 화염검을 휘두르며 지키고 있기에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 
 
예수님은 이미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곳이 에덴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곳이 실낙원이다. 실낙원의 특징은 무엇일까? 선악과를 따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 발가벗겨진 존재가 된 부끄러움, 넘치는 사탄의 참소소리, 타인들의 차가운 눈빛, 비난의 화살들, 우울, 좌절, 자포자기, 죽고 싶은 마음 들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나님은 왜 범죄 한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시는 것일까?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라서가 아닐까? 사랑은 불화를 참지 못한다. 사랑은 용서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마음이다. 그래서 먼저 손내미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내민 손을 거부한다. 또다시 등을 돌리고 더 높은 담을 쌓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단단히 굳은 우리 마음의 문에 손이 부서져라 노크를 하신다. 제발 문을 열라고. 내 사랑을 받아달라고. 
 
그러나 또다시 우리는 거절한다. 왜? 내 처지를 보면, 내가 너무 죄인이라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형편없는 죄인이라서. 나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살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하면서, 고행을 택한 엔젤의 모습처럼 자신의 인생을 처참한 상태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자신을 원하실 분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 상처 입고 목말라하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우리의 존재 이외에는.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관대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또한 이웃에 대해서.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부모, 나의 자식, 나의 교우, 나의 이웃에 대해서. 상처 입은 자들로,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듯, 그 모습 그대로 나의 가족과 나의 교우, 나의 직장동료, 나의 이웃을 그렇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비판하는 나의 눈이 아닌, 사랑하는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이를 바라본다면, 그런 나의 마음은 천국이 될 것이고, 진실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은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될 것이다. 
 
만약 <리디밍 러브>에 나오는 엔젤과 같은 창녀가 교회에 나온다면, 교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할 수 있을까?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술이 잔뜩 취한 모습으로 부랑자가 교회에 들어온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할까? 과연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어서 오라고, 잘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사라가 만들었던 막달레나의 집을 통해서 한 때 창녀였던 수많은 여성들이 새로운 삶으로 가는 문턱을 넘었다. 우리 교회가 천국을 확장하는 교회가 되려면, 낙심하고, 상처 입고,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 우리의 표정,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가 그래서 중요하다. 
 
또,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내가 헌금 많이 하면, 봉사 많이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겠지. 천만의 말씀.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무엇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시다. 먼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지, 무엇을 해서 사랑받으려 해서는 안된다.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싫어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차원이 다른 사랑을 하시고, 차원이 다른 사랑을 원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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