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법을 위반한 예수와 제자들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다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를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라고 질책한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바리새인들을 반박한다. 다윗은 굶주렸을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주었다.

이 얘기를 들은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아니, 자기가 마치 다윗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또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특수한 상황이지 않은가?' 반면, 예수님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상상하건대, '이 바보들아, 나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새롭게 온 너희들의 왕이다. 아니 나는 다윗의 주인이다.' 예수님은 단호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고 답하신다.
주인이란 뭔가? 뭐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주인이 아니던가?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저 일개 사람으로 생각할 뿐, 신으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런 지적질을 하는 것일게다. 아니 자기들이 예수보다는 법을 더 잘 아는 권위자들이라는 생각이 손쉽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게 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당당히 하신다. 다른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는 일으켜 세우신다. 뭔가 큰 퍼포먼스를 하실 모양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물으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러고는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라고 하신다. 그러자 즉시 그 손이 회복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 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손마른 사람이 치유받는 것을 보고 기뻐했을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아니, 그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를 고민할 뿐이었다.
안식일법의 근본 취지는 무엇인가?
자, 그렇다면 진짜 안식일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안식일법에 대해 살펴보자. 출애굽기 20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모두 마치신 후 제 칠일에 쉬시었다. 그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지정하셨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6일 동안은 열심히 일하되,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과 자식들, 심지어 종들이나 객, 가축까지도 말이다. 안식일법의 핵심은 노동으로부터의 쉼, 휴식이다. 그렇다면 단지 일만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시고, 밀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을 나무라기는커녕,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들며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비난하신다.
법이란 무엇일까? 법이란 최소한의 장치가 아닐까? 힘든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최소한의 방법은 단 하루라도 쉬게 해주는 게 아닐까? 요즘은 어떠한가? 주 5일제 근무를 넘어 주 4일제 근무를 도입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이 기업들은 6일간 열심히 일하지 않으니 안식일법 위반으로 보이지 않을까? 반면, 이 기업들은 안식일법의 근본취지를 더욱 확대 적용하는 기업들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들 기업은 하나님이 최소로 정한 하루의 휴식을 넘어 더 많은 안식을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안식의 근본 정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배고픈 자에게 안식은 음식이다. 병자에게 안식은 치유이다. 외로운 자에게 안식은 친구이다. 속박된 자에게 안식은 해방이며, 죄인에게 안식은 죄로부터의 속량이다.
안식을 주는 자, 예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법을 새롭게 가르치신다. 율법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율법을 어기었다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 거룩한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안식일법의 근본취지를 실천하는 것이 거룩한 삶임을 가르치신다.
들판에서 배고픈 5000명, 7000명을 먹이신 사건이나,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사건들 모두 안식의 제공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또 십자가 사건은 가장 큰 안식을 주시는 사건이 아니던가! 죄로 얽매인 자들, 그로 말미암아 사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에게 자신을 죄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이 아니던가!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예수 제자의 안식을 준수법
그렇다면, 예수님의 은혜로 안식을 얻은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 이 안식일법을 지켜야 할까? 예수는 이 땅의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의 제자라면 마땅히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가신다. 아니 극단으로 치달으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내어주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상이 클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롭다고 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자비하라고 하신다.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나 역시 비판과 정죄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넘치도록 받게 될 것이라 하신다.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는 자는 여전히 소경이다. 이제 눈을 뜰 수 있을까? 배고픈 육체의 안식은 음식이요, 목마른 영혼의 안식은 용서이다. 우리의 안식을 파괴하는 것은 법을 내세운 속박과 가혹한 비판과 정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량으로 놀라운 안식을 얻었다면 이제 우리도 다른 이를 안식케 하는 것이 예수 제자의 도리이자 안식일 준수법이 아닐까?
나는 과연 예수님의 기준에 합당한 제자인가? 아니, 결코 아니다. 나는 예수님 발의 먼지만큼도 못 따라간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처럼 나약한 나에게도 당신의 기준에까지 올라오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대가 없이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이 베푼 은혜를 생각한다면,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다면, 내가 기꺼이 성령께 복종하고, 주님의 몸으로 나를 내어 준다면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내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라
오늘따라 주님의 말씀이 무척 부담이 된다.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라고 하신다.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주초 없이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신앙이란 금주, 금연 등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안식일 법의 근본 취지는 소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쉼을 제공하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고,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법을 지킴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법의 목적을 실천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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