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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앙 이야기

나는 예수를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 [누가복음 5장]

by 박노찬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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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을 수 있었나?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대답하며 그물을 내린다. 그 결과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는다. 

 

여기서 나는 의구심이 든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전문가이지 않는가? 그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력이나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적 순종을 한다. 그리고 잡은 수많은 고기들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앞에 엎드려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시기를 간구한다. 

 

나의 의구심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베드로는 왜 자신이 고기 잡는 일에 전문가임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수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적 앞에서 기쁨 대신 두려움의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 역할을 감당한다. 

썸네일-나는 예수를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
나는 예수를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발견하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고쳐주신다. 당시 문둥병은 죄인의 증거이다. 하나님께 죄를 지어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런 죄인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이 내린 병을 고치는 이 예수는 누구인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어야만 한다. 

 

다음 이야기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더욱 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번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신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방법이 앞의 것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손을 대시는 대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신다. 그러자 갑자기 그곳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신성모독죄를 씌우고자 한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은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집으로 가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공회에 회부되어 돌에 맞을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 그들의 대표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다. 왜? 그들은 눈속임하는 마술을 본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증거로서의 치유를 목격한 것이다. 이런 능력을 행하는 이 예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면 이 예수는 신적 존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신적 존재 앞에 보인 제자들의 반응

베드로는 수많은 물고기를 잡는 기적 앞에서 오늘 대박을 터뜨렸다고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도저히 그런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어 자신을 떠나시기를 간구했다. 신을 만나는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기쁨 이전에 두려움이다. 또한 자신의 죄인 됨의 발견이다. 

 

두 번째 반응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버리고 신을 좇는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뿐만 아니라, 세관에 있던 레위(마태) 역시 예수님이 "나를 좇으라"라고 하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다. 

 

새 옷과 새 포도주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참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그렇게 되면 새 옷도 버리고 헌 옷도 새 옷 조각과 조직 강도가 달라 옷을 제대로 깁지 못한다. 아깝지만 헌 옷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새 옷을 온전히 지키는 방법이다. 

 

또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면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부대가 팽창될 때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까운 새 포도주와 가죽부대 모두를 버리게 된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가?

우리는 여전히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여전히 헌 가죽부대에 담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의 말씀 대신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더 앞세우지는 않는가? 

 

나는 과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 베드로는 배와 그물 등 모든 것을 버렸다. 레위는 세관원이라는 돈 잘버는 직업을 버렸다. 예수님 앞에서 그것들은 이제 헌 옷과 낡은 가죽부대가 되고 말았다. 그것들이 물론 소중한 것들이지만, 예수님이 이제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위해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 때는 예수님을 위해 '무소유'를 선언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것만을 취하며 살겠다고 했던 적이 있지만, 사역자의 삶을 떠난 지금은 다시금 모든 것을 취하고, 더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괴로운 마음에 휩싸인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나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우선순위는 몇 위인가? 그 분의 말씀이 최우선인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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