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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앙 이야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

by 박노찬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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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설교를 하다니!

2024년 8월 4일, 오늘은 역사적인 날, 내가 다시 설교를 하게 된 날이다. 무려 13년 만의 일이다. 오늘 나는 계룡 은혜와사랑의교회 협동목사로 부임설교를 했다. 예배 전 찬양시간부터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너무나 오랜만의 설교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설교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그동안의 일들을 나누고 고백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썸네일-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안의 질문

목회를 그만둔 지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안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다시 설교할 수 있을까?", "다시 목회할 수 있을까?" 내 마음속 답변은 "아니요"였다. 지인들이 때때로 물었다. "다시 목회하실거죠?" 그때마다 나는 뚜렷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낙담했다. "힘들겠지?" 그런데 오늘 다시 교회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시작의 책, 창세기

부임설교 부탁을 받고, 나는 거의 망설임 없이 창세기를 본문으로 설교하고자 마음먹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아, 이제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야겠어. 창세기부터 성경 말씀을 다시 읽어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나도 그런 심정으로 첫 설교 본문을 창세기로 삼았다. 
 
그런 마음으로 펼친 창세기 1:1절은 평소와는 달리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 그렇구나. 창세기 1:1절은 대단한 선언이구나. 이건 그냥 성경의 도입부가 아니구나!' 
 

믿음의 대상

창세기 1:1절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을 명확히 밝힌다. 이것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은 엄청난 차이가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 앞에 내 안에서는 이런 질문이 일어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신데, 내 인생은 왜 이모양이지? 나는 멋진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 바람과는 반대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공허하고, 어두컴컴하지?'
 

나의 실상

이런 우울한 마음으로 2절의 말씀을 읽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아, 어쩌면 이 구절은 이토록 나의 마음을 후벼파는 것인가? 내 마음의 적나라한 상태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개척교회 담임목사 시절, 자신의 건물을 예배당으로 내놓은 교인으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내 인격(자존심)에 너무나 큰 상처를 준, 스토킹 문자에 더 이상 목회를 계속할 힘을 잃고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목회를 그만두니 갈 데가 없었다. 이 교회 저 교회 예배를 쇼핑하듯 관람했다. 얼마 전까지는 모 교회를 미등록교인으로 수년간 다녔다. 
 
목회를 그만두고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보험영업, 우유배송 및 판촉, 심지어 관광버스에서 건강기능식품도 팔았다.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먹고 살려면 무슨 일도 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은 택배 일을 하고 있다. 만나는 분들 중에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이런 일 하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도 그 말에 백번 천 번 동감을 한다. 그러나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속으로 반문한다. 
 
또 어떤 이는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묻는다. 하루에 2만보, 3만보를 걷는데 어찌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은 이골이 나서 그런지 견딜만하다. 또 먹고살 돈이 들어오니,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리라. 그런데 진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정체성의 혼란이다. 내가 목사인지, 세상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나는 이 둘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가련한 영혼을 달래기 위해 블로그라는 것을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고 정리해서 포스팅을 했다. 나름 주경야독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한편 두 편 글을 올리면서 가끔씩 댓글도 달리고,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자기만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던 어느날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해 준 책을 읽었다. 미국인 작가 피트 데이비스의 <<전념>>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이 시대를 일컬어 "무한탐색시대"라 표현했다. 현대인들은 한 가지에 전념하지 못하고, 여러 선택지를 열어놓은 채 끊임없이 탐색을 한다. 마치 인터넷쇼핑을 할 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싼 것은 없나 비교 검색하면서 최저가를 찾는다. 그러다 또 이 가격에 살 수 있는 더 좋은 상품은 없나를 찾으면서 계속 서핑을 하다가 끝내는 구매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다. 
 
또, 이 책의 저자는 폴란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소개하는데, 그는 오늘날의 세상을 <<액체근대>>라 표현했다. 액체는 고정된 모양이 없다. 담는 그릇에 따라 그때그때 모양이 변한다. 액체는 변신의 귀재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이렇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고체가 아닌 액체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정체성이나 장소, 공동체에 묶여 있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것이든 약간의 거리를 둔다. 어떤 일에도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언제든지 선택지를 열어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액체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가 괴물이 되었는가, 나도 고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나의 이런 마음의 상태를 잘 나타내주는 노래가 떠오른다. 조용필의 <꿈>이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찾아 화려한 도시로 향한다. 그러나 쉽게 그 꿈을 찾지 못한다. 이곳 저곳을 헤매다 지친 나머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하나 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 노랫속의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홀로 남아 공허한 마음에 하늘을 쳐다본다. 별들만이 반짝인다.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려나 하지만 대답이 없다. 그는 슬픈 마음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고향의 향기가 들려온다. 따뜻했던 고향의 추억이 밀려온다.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나의 가슴에도 눈물이 흐른다. '오, 주님, 이 가련한 인생을 어찌하오리까?' 
 

반전의 소식

그런데, 나에게 구원의 천사가 나타났다. 바로 맹00 은혜와사랑의교회 담임목사다. 그가 나의 가브리엘이다. 은혜와사랑의교회에 합류하라는 제안이 왔다.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으나, 합류 결정을 내렸다. 사실 코로나 발생 전부터 제안을 듣고 함께 하려고 했었는데, 코로나 발발로 잠시 미루자는 생각을 한 것이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와의 합류 계획은 추억 속에 묻혔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은혜와사랑의교회 설교단에 섰다. 
 

성령의 운행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사건은 나에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분명한 것은 맹 목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운행하신 것이리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4년 전의 첫 제안에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 목사는 은혜와사랑의교회에 부임하면서 나와 함께하자는 2차 제안을 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께서 그 안에 나를 향한 마음을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맹 목사는 성령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했고, 나는 그의 제안에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 여겼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영적 방황을 끝내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세상 속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교회 안에서, 영적 공동체 안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목사지만, 세상 속에서 나를 목사라 불러주는 이가 없었다. 이곳에 오니 나를 목사로 불러준다. 비로소 나의 이름을 찾은 듯하다.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른다. 그저 한걸음씩 성령의 인도에 따라 나아갈 뿐이다. 미력하나마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길 바란다. 
 

다시 말씀으로

창세기 1:2절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지구는 온통 물로 뒤덮인 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다. 하나님은 질서 정연하고 충만하고 빛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혼돈으로 가득한 상태, 발판을 삼을 만한 그 무엇도 없는 상태,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의 인생은 더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는 상태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스럽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고, 아직도 어둡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놀랍게도 준비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혼돈 상태면 된다. 그저 허무하고 공허한 상태라면 족하다. 어두컴컴해도 괜찮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내가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면 된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서 창세기 1:2절 후반부가 말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자신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모양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또, 3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다른 것은 하나도 필요가 없다. 그저 말씀만으로 충분하셨다. 
 

내 인생의 창조에 필요한 것

그렇다면,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인생이 새롭게 창조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금수저로 태어났어야 되었을까? 든든한 백이 필요한가? 서울대를 나와야 하나? 아니라는 말씀이다. 단지 말씀뿐이다. 말씀이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친절히 글로 적어주신 성경 말씀이 있는데, 우리의 삶이 아직도 불만스럽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인가?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가지고 내 인생 하나 바꾸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잘 모르거나,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래서 말씀 대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열심히 살다보면, 내 삶이 바뀌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듣는 자세로 읽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놀라운 말을 한다. 
 
요한복음 1:1-3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 자체로, 창조의 주체로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왜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적 논리로 예수님을 소개할까? 내가 느낀 이유는, 예수님 승천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요한은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이 곧 예수님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 만나려면 성경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적 존재를 만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저절로 경외감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이런 경외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가? 
 

새로운 인류의 창조자

나는 여기서 좀 더 깊이,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하시는지 사도 요한의 설명을 들어보고 싶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1: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말한다. 
 
데자뷰가 느껴지지 않는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빛이 있으라."였다. 천지 창조는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빛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온 인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빛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12절에 (깨닫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직접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이 "빛"에 대해 증거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누가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 할까? 바로 여러 성경의 기록자들이다. 성경은 우리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증인들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입으로 시인하여 영접할 때 구원을 받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존재 자체가 바뀐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그분은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겠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매일매일 그분만이 주시는 양식을 주신다. 바로 하늘 만나인 성경 말씀이다. 이것을 먹고 우리는 자라나 영적 열매를 맺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YES!!!"

오늘 나는 나의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비록 안수받은 목사라 할지라도 사명의 자리를 떠나고, 교회 공동체를 떠나고, 말씀의 자리를 떠나면, 우리의 삶에는 어느덧 혼돈이 찾아오고, 공허가 깃들고, 어둠이 짙어진다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고백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이유로든 이런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금 돌이켜 본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실패하고,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다. 이때 우리의 육신적 생각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힘들 거야.'이지만, 성령의 생각은 '아니,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말씀과 함께 말이야. 그 말씀이 바로 너의 빛이야!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야!'이다. 
 
당신의 인생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 새롭게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NO'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YES'이시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자. 우리를 새롭게 빚어 달라고 기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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