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6일 주일설교
본문 : 호세아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몇 년 전 밸런타인데이에 아내로부터 82%의 사랑을 받았다. 출근을 했는데, 아내로부터 “저의 82%의 사랑을 받으셨나요?“라는 문자가 왔다.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졌다. ‘아니, 100%도 아니고 82%의 사랑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나는 받은 게 없는데, 뭘 줬다는 거야?’ 알고 보니 아내가 속옷 서랍 속에 이걸 넣어 놓았다.

82% 드림카카오. 잠시나마 아내의 사랑을 82%라고 오해한 나를 자책했다. 아내의 사랑은 100%였을 텐데 말이다.
청혼을 할 때, 장문의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30년이 넘어서 대부분의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딱 한 문장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세상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소.”라는 문장이었다.
아내를 향한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쓴 문장이었다. 그만큼 아내가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뜻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문장이 아내의 마음을 심쿵하게 했던 것 같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세상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그 한 문장은 내 마음을 표현하는 필살기였다.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토로하고 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옆 동네 이름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차고 넘쳐서 하나님이 멸망시킬 때 함께 멸망한 도시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처럼 멸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보다 작아서 그럴까? 아니다. 그들과 똑같이 진노의 대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호세아서 1장 1절을 읽어보자.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1장 1절은 호세아가 처음으로 예언활동을 시작할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는 남왕국과 북왕국, 다시 말해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뉘어 있었는데, 남왕국 유다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4명의 왕이 교체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은 시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홀로 긴 시간 동안 통치를 하고 있었다.
유다와 이스라엘 중에 어느 나라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렇다. 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왕이 자주 바뀐다는 것은 뭔가 나라가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길게 통치를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때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확장을 했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한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한다. 어떤 말씀이 임했을까? 1장 2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태평성대 vs. 음란의 시대
나라가 태평성대를 맞이했는데, 하나님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때를 전성기가 아니라 크게 음란한 시대라 말씀하셨다.
삶이 부요해지고 걱정거리가 없어지면, 본능처럼 찾아오는 질병이 있는가 보다. 그것은 영적 교만과 쾌락을 좇는 삶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다 보니, 하나님도 필요 없어지고, 죄를 지어도 무감각해지게 된다. 호세아 12장 8절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부자가 되면 교만해지게 되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는가 보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약해지는데 반해 우상에 대한 믿음은 커진다는 것이다. 부자가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당시 인기가 높았던 바알 신을 섬기게 되었다.
바알은 비의 신, 풍요의 신이다.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라 믿은 거다. 그래서 그들은 건포도 과자(떡)를 만들어서 바알 신전에 바치고 나눠 먹으면서 여사제라 불리는 신전 창기들과 음란한 행위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으셨다. 그들을 사랑해서 애굽에서 건져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풍요롭게 살도록 허락했건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사랑하니 질투가 나서 견디질 못하셨다. 그래서 특별계획을 세우셨다. 그냥 말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나라를 폐하겠다는 것이다. 호세아서 1장 3-4절의 말씀을 보자.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고멜과의 결혼, 세 자녀의 출산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멜과 결혼을 해서 세 자녀를 낳는다. 첫째 아들을 낳고는,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지었다. 이스르엘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이다. 또, 호세아 1장 6절에 보면, 둘째 자식으로 딸을 낳는데,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짓는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8절과 9절을 보면, 셋째 자식으로 아들을 낳고는 ‘로암미’라 이름한다. ‘로’ 자가 붙으면 부정적인 의미이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인데,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세 자녀의 이름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온 세상에 흩으시며,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 이제부터는 내 백성이라 부르지도 않겠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단단히 삐지신 것 같다. 마치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자식과 절연하는 아버지처럼 보인다.
선지자 호세아의 입장에서 보면, 또 얼마나 기가 막힐까? 첫 번째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음란한 창기와 결혼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니 말이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그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은밀한 계획을 말씀하신다. ‘호세아야, 내가 왜 이러는지 아니? 사실은 말이야, 내가 이스라엘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래. 나의 궁극적인 계획이 뭔지 아니? 내가 그걸 알려줄게. 놀라지 마!’ 하시면서 말씀하신다. 호세아 2장 19, 20, 23절을 보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무엇인가? 이스라엘과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이 되어서 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왜 굳이 신이 인간과 결혼을 하려고 할까?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군지 너희가 제대로 알게 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두 번째 명령을 내리신다. 호세아 3장 1-3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 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다른 신, 즉 바알에게 건포도 과자를 바치면서 음란한 짓을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처절한 것 같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못 잊어서 사랑하신다니 말이다. 그러한 처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다시 사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호세아는 결국,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15개), 즉 은 30을 가지고 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는 것이다. 은 30은 당시 여자의 몸값이었다.
구속(속량)의 뜻
여기서 우리는 구속, 곧 속량의 뜻을 알게 된다.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자기 것인데, 값을 주고 다시 사 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구속받았다, 속량 받았다고 할 때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타락해서 사탄에게 팔리게 된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사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고멜을 다시 사 오라고 하신 이유는 뭘까? 고멜이 세 자녀를 낳고 바람이 나서 남의 아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멜은 어찌하여 바람이 난 것일까? 2장 5절 말씀에 그 이유가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 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들의 어머니’ 즉, 세 자녀의 어머니인 고멜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가서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여러 남자와 바람이 났던 것 같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그런데, 그들은 무엇으로 고멜을 유혹했는가?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 술들이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선지자와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떡과 물조차 풍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양털과 삼, 기름, 술들까지 풍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니 홀딱 넘어가 버렸다.
고멜을 유혹한 “떡과 물, 양털, 삼, 기름과 술들”을 요즘엔 뭐로 비유할 수 있을까?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 벤츠나 BMW, 매년 한 달간의 해외여행, 매 주말의 와인파티면 될까?
그런데, 고멜 만이 이런 것들에 넘어갈까? 우리는 어떨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속물근성에 절어 살지는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삶을 누린다 해도 거기에 생명이 없다면, 거기에 진정한 평안이 없다면,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과연 에덴일까?
물질은 누리면 누릴수록 만족이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한 불안함이 늘고, 남과 비교할 때 여전히 부족하게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커진다. 물질적 부를 쌓음으로써 어떤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결코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언제 제일 행복함을 느낄까? 바로 사랑할 때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이다. 아무리 부자여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가치가 느껴지지 않을 때는 극단적인 선택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은 왜 부자가 되려 하고, 권력을 얻어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할까? 그게 다 사랑 때문 아닌가? 사랑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 것일 게다.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다. 심지어 사랑을 돈으로도 사려고 한다.
Redeeming Love
지난 설 명절에 <리디밍 러브>라고 하는 책을 읽었다. 로맨스 작가로 유명한 프랜신 리버스가 쓴 책이다. 번역하면, <구원하는 사랑, 속량 하는 사랑>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은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당시는 골드러시 시대였다.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얻는 금은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살 정도밖에 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절망하였고, 허기진 마음에 술과 여자를 찾아 그나마 얻은 금을 탕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곳에는 유명한 창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의 여신’이라 불렀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와의 하룻밤, 아니 30분을 위해 고된 노동을 통해 얻은 사금을 들고 그녀를 찾아갔다. 사랑의 여신에게서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사랑과 위로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그녀 역시 삶의 소망을 잃은 채 하루하루 남자들을 받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싫었다. 또 오로지 육체의 정욕을 위해 자신을 탐하는 남자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남자가 찾아와 청혼을 했다. 그 남자는 농부였고, 이름은 미가엘 호세아였다. 이름이 심상치 않다. 미가엘 호세아. 이름에 걸맞게 그 남자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붓감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를 해왔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랑의 여신’이라 불리는 창녀를 찾아 청혼을 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어느 날 채소를 팔러 도시에 온 이 미가엘 호세아는 엔젤이라는 그 사랑의 여신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아뿔싸 바로 그 여자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오, 하나님, 이건 제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하나님이 짝지어준 신부라는 것을 너무나 강하게 느낀 나머지 그녀를 찾아가 청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엔젤이라는 창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찾아와 창녀인 자기에게 결혼을 해달라니,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혔음이 틀림없다. 그녀는 당연히 차갑게 거절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엘 호세아는 날마다 그녀를 찾아가 사랑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매몰차게 거절을 한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돌아와 한참 동안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매춘부와 결혼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당신의 명령을 따르기 전까지는 제 마음에 평안이 없겠지요. 하겠습니다. 이 일을 통해 어떤 선하신 일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순종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찾아갔다. 아니, 그런데 그때는 그녀가 또 자살을 시도한 때였다. 이번에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미가엘 호세아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금을 주고 그녀를 구해온다. 그녀에게 다시 청혼을 한다. 그녀는 반 기절한 상태에서 대강 수락을 한다. 미가엘 호세아는 상처 투성이인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준다.
그러나 그녀는 미가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일까? 그녀에게는 너무나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라는 저주의 말을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쫓겨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을 찾았지만, 사생아를 낳아온 어머니를 받아주지 않아서 또 쫓겨났다. 성당의 신부를 찾아갔지만, 신부 역시 거절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그녀의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 그러다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결국 홀로 남겨진 8살의 이 어린 여자 아이는 매음굴에 팔려가게 되었다. 거기서 포주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고, 성숙한 나이가 되자 하루 종일 남자를 받는 창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그녀에게 순수한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가엘 호세아라는 신실한 농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이 버림받은 영혼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다.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도 응답이었지만, 미가엘 호세아는 순종을 한다.
그러나, 상처가 너무나 깊었던 엔젤이라는 창녀는 미가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도망을 치고 말았다. 또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그때마다 이 미가엘 호세아는 그녀를 또다시 찾아오곤 하였다.
결국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실한 미가엘 호세아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나 더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더러운 죄를 씻기 전까지는 이 남자를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행을 택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몸을 혹사해 가면서 농사일을 했다. 또 시냇가에 가서 자신의 온몸을 자갈로 박박 긁어냈다. 죄를 씻어내려고.
그러나 미가엘 호세아가 원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엔젤 그녀 자체였고,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고, 자신을 순수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겨울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봄바람이 불면 얼음이 녹고 대지에 희망이 싹튼다. 그녀의 마음도 미가엘의 끊임없는 사랑 앞에서 조금씩 녹아갔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사라!” 엔젤이라 불렸던 여인의 본명이었다. 잊고 지냈던, 창녀가 되기 전의 본래의 이름이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닫게 된다. 나를 사랑하는 미가엘 호세아를 위해서 내가 줄 선물은 바로 이거구나. 어떤 노동이나 고행이 아니라, 바로 “사라”라고 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발가벗은 몸으로 미가엘에게 달려간다. 그전에는 자신이 그렇게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전부를 남편에게 줄 수 있었다. 드디어 부부는 하나가 되었고, 에덴을 맛보게 되었다.
복락원
누가, 또 무엇이 이 부부에게 에덴을 허락한 것일까? 가장 원초적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들어 치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셨다. 하나님은 정죄 대신 오히려 이렇게 외치신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이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는가? 혹시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껴지는가? 그렇다 할지라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고 있다.
또 낙심하며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는가? 그래서 마음의 장벽을 높이 쌓아 놓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테야 하면서 스스로 감옥 안에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오기 바란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 자신을 원하고 계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에덴으로 초청하셔서 함께 살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면 그곳이 바로 에덴이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또 미가엘 호세아의 순종이 없었다면, 엔젤이라는 창녀를 에덴으로 인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교회가 에덴이 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면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뭔지는 잘 모르지만 왠지 세상과는 다른 사랑이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감정적인 사랑, 아닐 것이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랑도 아닐 것이다. 내 눈에, 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사랑하여 구속해 주셨듯이, 나도 비록 창녀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에 순종함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지만,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눈에 거슬리는 일들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죄 중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이미 정죄하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교회를 에덴으로 만들고, 많은 영혼들을 에덴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보여주셨던 <리디밍 러브>, 다시 말해 “구속하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창녀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긍휼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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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jzxfRM5bsY?si=Bs7B7tDZEtF3_K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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