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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앙 이야기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 [창세기 4장]

by 박노찬 202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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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9

은혜와사랑의교회에 부임한 지 벌써 4개월 차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 성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참으로 감사하다. 
내가 무엇이길래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목사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나를 믿어주고, 무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 같다. 나의 내면을 보고, 실생활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실망을 할 수도 있는데, 그저 목사라는 이유로 무사통과되는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 아닐까? 이런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는 예배라는 형태로 감사를 표현한다.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

 
나는 오늘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다소 고루한 주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다 아는 얘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배는 본질에 관한 것이고, 심각한 주제이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은 재미없는 얘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미는 잠시 사람을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심각한 얘기, 진지한 얘기가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오늘 나의 설교 목표 중 하나는 성도들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

이 목표 달성을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 예배란 무엇일까?
●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 
● 내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 되고 있을까? 
● 나는 열심히 예배드린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내 예배를 거부하신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사실 나는 2주 전(9월 27일)에 중고등부 모임에서 예배에 대한 주제로 교육을 했다. '나는 과연 참된 예배자인가?'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학생이 자신은 참된 예배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예배 시간에 집중해서 설교 말씀을 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 예배 시간에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한다는 말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또 다른 학생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한 학생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은 참된 예배자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보거나 딴청을 부릴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참된 예배자인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당신이 참된 예배자가 못 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든, 그 대답 안에는 예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들어 있다. 아까 학생들의 대답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대개는 교회 안의 활동, 특히 예배 시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예배시간에 딴생각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예배를 잘 드리면 훌륭한 예배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중고등부 한 멤버가 이런 말을 했다. 교회에서 예배는 잘 드리는데, 교회 밖의 실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참 예배자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멤버의 생각 속에는 예배의 범위가 교회를 넘어 생활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배는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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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삶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고 계실까? 나는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할 때마다 아찔하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내가 드리고 있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 

가인과 아벨

예배에 대한 성경의 예화를 들 때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다.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 짓는다. 성경은 이 가인의 이름의 뜻을 밝히고 있다. 그 뜻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아들을 얻은 하와의 감격스러운 마음을 엿보게 된다. 하와는 왜 가인을 낳고서 감격하였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 엿볼 수 있게 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뱀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온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 당시 하와가 이 예언을 들었을 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예수님을 떠올렸을까? 아닐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낳을 자녀를 통해 이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이다. 가인을 낳은 후에 하와는 가인이 자신을 타락하게 만들고, 자신의 인생에 고통을 가져다준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와는 감격스럽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득남하였다"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제 하나님께서 가인을 통해 나의 고통을 끝내주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와의 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루어졌을까? 창세기 4:2절을 보자.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가인을 낳고는 그 이름의 뜻을 밝히고 있는데, 아벨을 낳고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성경은 왜 아무런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을까? 두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하나는 히브리인들은 '아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설명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아벨'의 뜻은 무엇일까? 나는 그 뜻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벨은 "공허" 또는 "허무"라는 뜻이다. 아니 첫아들 가인을 낳고는 감격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했는데, 둘째를 낳고는 고작 "공허해~", "허무한 일이야~" 라며 탄식했다는 것이다. 하와는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우리는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 가인을 낳고 하와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 이름을 짓는 것을 볼 때 그 기대가 산산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이름을 "허무", "공허"라 지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식에게 기대를 품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첫째 아들 가인이 어땠길래 하와의 마음이 이토록 무너졌을까? 창세기 4:3절 이하에서 우리는 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신의 소유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가인은 자신이 기른 곡식으로, 아벨은 자신이 키운 양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가인의 제물에 문제가 있었을까? 율법에 의하면 가인이 드린 제사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소제 역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다. 소든 양이든, 비둘기든, 곡식이든 하나님은 형편껏 드리는 제물을 받으신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이어지는 가인의 반응을 볼 때 우리는 그 힌트를 얻게 된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을 붉히며 분을 낸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화를 내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선을 행했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가인은 회개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해진다. 끝내는 그를 유인해서 죽이고 만다. 가인은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믿음 좋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벨이 미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미운 것이다. '아니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누구의 제사는 받으시고, 누구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는 거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어찌 나에게 묻습니까?"라고 뻔뻔스럽게 대답을 한다.

마음과 행동

우리는 이러한 가인의 행동에서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형제를 대하는 태도이다. 지난 9월 한 달간 중고등부에서는 잠언을 큐티했다. 잠언 1: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보면, 가인에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또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미련한 자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훈계를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한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일단,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한다. 가인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한다. 정말로 하나님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모르시고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지금 가인에게 책임 추궁을 하고 계신 것이잖는가? 그런데도 가인은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를까?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작은 이익 앞에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앞에 장막을 치고 주저 없이 죄를 짓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익이 더 커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의 전지 하심을 인정하되,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있다. 
 
또,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말속에서 우리는 형제를 대하는 가인의 태도를 보게 된다. 잠언 17:17절에 보면,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라고 하는데, 가인은 오히려 형제를 죽였다. 그것도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계획적 살인을 했다.
 
율법의 두 축은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이다. 가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한 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인에게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다. 그저 형제도 경쟁상대일 뿐이다. 이 형제를 확대하면 이웃이 된다. 형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가장 가까운 형제조차 사랑할 수 없고 경쟁상대로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은 오직 '자기 사랑'밖에는 없다. 그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자기'이다. 
 
그렇다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 가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까? 그것 역시 자기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나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나도 아벨처럼 예배하는 사람이야."라고 말이다. 가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도 예배자임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이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대답 속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다. 이런 가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왜 아벨을 지키지 못하셨습니까?', '내가 아벨을 죽일 것을 하나님은 알지 못하셨습니까?', '아셨다면 왜 막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벨을 죽여도 하나님은 어쩌실 수 없을 거야.'
 
가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기 자아의 뜻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형식은 예배자였지만, 내용은 하나님 경외 대신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자였다. 
 
이러한 가인의 태도, 이러한 마음 자세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아벨과 함께 제사드리기 전이었을까, 후이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신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인의 예배 행위는 겉으로 보면 아벨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마음이다. 우리는 결과를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시대다. 그러나 결과만을 중시할 때 우리는 크나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부자와 과부의 헌금 이야기

부자와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있다. 결과만을 중시할 때, 부자의 많은 헌금 앞에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누가 봐도 과부보다 부자가 더 많은 헌금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달랐다. 주님은 부자의 큰 헌금을 오히려 작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부는 비록 작은 동전 두 개를 냈지만, 그것은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에 그녀의 헌금이 훨씬 더 크다고 하셨다.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목숨과 같은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비록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사랑의 마음을 표했던 것이다. 

예배의 본질

마음을 드리는 것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예배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몸은 와 있는데, 마음은 딴 곳에 있지는 않는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다양한 섬김 속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는가? 헌금 속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 똑같이 찬양 부르고, 똑같이 봉사하고, 헌금하고, 예배를 드려도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외식에 불과한 것이고, 그러한 외식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드리는 것

또 예배의 본질은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드리고 있는가? 생명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참된 예배라 할 수가 없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구약의 대표적인 제사는 번제이다. 번제는 살아있는 양이나 소, 비둘기 같은 짐승을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올려드리는 제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다. 바로 다른 짐승의 생명으로 죄인의 목숨을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짐승을 일컬어 대속제물 또는 속죄제물,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은 죄인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뿐, 여전히 우리의 근본은 죄인이라는 사실,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남을 너무나도 쉽게 정죄한다. 마치 자기는 의로운 것처럼 말이다. 시기심이 가득하고, 비록 행동까지는 옮기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는 음욕이 가득하고, 돈을 사랑하고, 남의 것을 갖고 싶고, 미움과 살인의 마음이 가득하지 않는가? 간음한 자에게 먼저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알량한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고 우리의 머리를 들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해본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성도라 부름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가? 나 대신 영원하고도 완벽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때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없이는, 내 생명을 대신하신 예수님의 피공로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다. 그 십자가는 내 생명을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명뿐 아니라 나의 생명까지도 포함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의 짐승 제사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죄인인 인간은 자신을 대신해 죽을 짐승을 제사장 앞으로 끌고 간다. 그런 다음 짐승의 머리에 손을 올려 안수함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시킨다. 그런 다음 그 짐승은 죄인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제물이 되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죄인은 죄를 용서받고 깨끗함을 인정받게 된다. 용서받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죽은 십자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속에 나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신비스럽게도 나의 옛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로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생명이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옛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나의 옛 자아가 버젓이 살아서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경험한다. 또한 예수님은 내 안에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정말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나의 옛 자아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우리가 느끼는 옛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옛 자아의 허상이라고 말이다.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이 옛 자아의 허상을 붙들고 살라고 속삭인다. 너에게 선택권이 있으니 네가 선택하며 살라고 말한다. 그게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자유라고 속삭인다. 선악과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마귀의 목적은 우리 마음 중심의 왕좌에 옛 자아의 허상을 올려놓으려고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영적 상태를 끝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사도 바울의 방법을 추천드린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날마다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인정하고, 내 안에는 오직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음 중심의 왕좌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 우리의 죽음을 선포하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높이고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요즘 우리 중고등부에서는 잠언 큐티를 끝내고 마태복음 큐티를 시작했다.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소개한다. 마태가 소개하는 이 유대인의 왕은 당시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던 헤롯이나 로마의 가이사처럼 군림하고 폭력을 행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 양 떼를 돌보듯 자기 백성을 돌보는 목자이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 이 새로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러 오는 동방박사들을 특별출연 시킨다. 이 동방 박사들은 위대한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 동방의 그 먼 곳 페르시아로부터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새로운 왕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소중한 예물을 들고, 그 먼 길을 몇 달에 걸쳐 찾아온다. 그들은 왜 페르시아의 왕도 아닌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러 왔을까?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기록한다. 역사 상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의 후손으로 새로운 왕이 오신다는 것이다. 동방의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별을 관측하다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징조를 발견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인류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새로운 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왕께 드리는 예물을 준비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서 사절단을 꾸며 경배의 길에 나섰다. 그들의 행렬은 얼마나 대단하였을까? 그들의 방문 소식에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드디어 예수님을 발견한 순간 그들은 얼마나 감격하였을까? 인류사의 위대한 왕을 알현하는 자리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왕을 눈앞에서 목도하다니!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예배는 우리의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알현하는 자리이다. 동방박사들처럼 경외감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는가?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은 무엇인가? 왕께 드릴 합당한 예물인가? 주님은 부자의 큰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기뻐하셨다. 그녀의 두 렙돈에는 그녀의 생명이, 그녀의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길 원하실까? 바로 우리의 생명,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 아닐까? 우리의 생명을 주께 드리면, 주님은 주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나는 죽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예배를 드릴때,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지긋지긋하게 죄의 종노릇 하며 살던 옛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는 승리의 삶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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