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이라는 단어는 전문 기독교 용어인가? 그렇게 느껴진다. 왜?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에게 이 말은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였다.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또는 '행운의 선언'을 뜻하였다.
초기 교회 당시 '복음'이라는 말은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용어였다. 황제의 등극 소식이나, 전쟁의 승리 소식을 알리는 전령의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새로운 황제가 나타났고, 이제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의미였다. 그러나 과연 무력의 승리로,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왕의 출현으로 세상은 의롭게 바뀔 것인가?
기독교적 대답은 "No"이다. 세상은 그렇게 강력한 힘으로 좋은 세상이 되지 못한다. 강력한 정권은 더 강력한 정권에 의해 손바뀜이 될 뿐이다.
진짜 좋은 세상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이것이 성경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복음'이다. 그래서 성경 저자들은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용어인 '복음'이라는 말을 성경 안에 가져왔다.
'유앙겔리온'을 영어로 표현하면 'gospel'이다. 가스펠은 갓(God, 하나님)과 스펠(spell, 소식/선포)의 합성어이다. 'spell'은 단어의 철자를 하나씩 말하거나 올바르게 쓰는 것을 뜻한다. 즉 가스펠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될 때 사람들은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스펠은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이 암울할수록 예언자들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다.
앗수르의 위협과 침략 앞에서 성경 저자들은 '출애굽기'를 썼다. 야훼 하나님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출애굽을 허락하신다.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신다. 그리고 광야에서 율법을 수여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하였고, 그리하여 '언약백성'이 된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율법에 순종할 의무가 주어졌고, 하나님은 백성을 보호할 의무가 주어졌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겠다는 언약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때 하나님은 늘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저 예수 믿으면 복받고 천국가는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상호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호 신실성의 바탕 위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 가는 것이다.
이 언약이 깨어졌을 때 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설 수가 없다. 그 언약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철저히 지키는 것인가? 그래서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십일조를 계산해야 되는 것인가?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간단히 정리해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풀어쓰면, "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의롭게 사는 것이다.
힘인가, 사랑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우지는가? 강력한 힘인가? 목숨까지 주는 사랑인가? 때로 우리는 폭력은 강하고, 사랑은 무기력해 보인다.
당신은 힘쎈 사람이 되고 싶은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권력가가 되고 싶은가, 사랑의 사도가 되고 싶은가?
부자가 되고 싶은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힘인가, 사랑인가?
왜 돈을 내면서까지 학원에 다니는가? 힘인가, 사랑인가?
제국과 하나님의 나라
아름다운 기독교 국가는 세워질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미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로마는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 나라는 진정 기독교 국가였는가? 그 나라는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나라였는가?
'기독교 국가'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국가'는 폭력을 기초로 세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찰과 군대가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부국강병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제국이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민생'을 강조하는 정부는 그나나 조금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수는 있으나, 폭력을 버리지 못함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가?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소식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이 세상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소식인 것이다. 또,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믿고 따를 것이냐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가라는 초청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자고 하는 도전인 것이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폭력적인 제국조차 감당치 못하게 되는 대안 세력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조찬기도회에서 제국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라고 외치는 예언자 집단이 되어야 한다.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인가? 관세는 보호무역주의 아래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매기는 세금이다. 주로 약소국이 연약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관세 정책은 강대국의 일방적인 폭력행사이다. 그동안 약소국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미국 기업들이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로 말미암아 미국인들은 저렴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 발발로 공급망 문제가 생기고, 안보 이슈를 들어 리쇼어링을 외치고 있다. 한 때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화를 외치던 나라가 이제는 보호무역과 리쇼어링을 외친다. 이를 위해 트럼프는 당근이 아닌 채찍을 택했다. 바로 관세다. 또 관세 협상을 빌미삼아 한국 정부의 직접 현금 투자를 강요한다. 미국 언론조차 이는 날강도짓이라 비난한다. 남의 나라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 나라의 이익만 우선한다.
과연 자국 우선주의 정책은 성공할 것인가?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강대국의 이익 우선 정책이 세계적으로 통할 것인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국가간의 관계 발전은 상호호혜주의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일방통행은 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화려했던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본다. 미국의 말로 역시 언젠가는 볼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 차는 날이 올 것이다.
복음은 소망이다
복음을 우리는 흔히 '기쁜 소식'이라 한다. 영어로 하면 'good news', 즉 좋은 소식이다. 역으로 생각할 때 이 복음이 선포되는 상황은 '나쁜 상황'이다. 나쁜 상황 가운데 선포 되는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사야서 52:7-10절을 보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냈으므로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이 복음은 언제 선포되었을까? 이스라엘은 집과 성전이 파괴된 후 낯선 땅(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포로기 동안 그들의 뇌리에는 이 질문이 끊임없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들린 이사야의 복음은 과연 저 하늘과 사후 세계에 관한 것이었을까? 이사야의 복음은 이 땅의 새창조와 모든 것의 갱신(새롭게 함)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압제자들(바로)을 대항해 싸우시고 죄악으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세상에 구원(정의와 평화)을 가져오신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일부 이스라엘은 이 구원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이사야가 내다본 '좋은 소식'이었을까? 역사를 볼때 포로기 이후의 삶은 여전히 암울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성전이 재건되고 예배가 일부 회복되었지만, 이어지는 헬라(그리스), 로마 제국 아래에서 그들은 더 혹독한 세월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장엄한 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복음은?
신약 성경은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탄생 소식을 알린다. 우리는 '구원자', '구세주'라는 말 역시 기독교 용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 말 역시 정치적인 용어였다. 예를 들어 서부 소아시아의 프리에네(Priene)라는 곳에 로마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를 치하하는 비문이 있다. 그 비문에는 아우구스투스를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그는 신의 섭리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제국의 지도자이며, 전쟁과 갈등을 끝낼 구원자(소테르, soter)"라고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가 품은 소망의 절정으로 칭송받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출생한 해를 '좋은 소식의 시작'으로 기념하였다.
이 비문이 발표된 지 채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마가는 자신의 복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고대 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첨예한 구분이 없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황제를 신과 같은 존재로 경배하고 신들 중의 하나로 숭배했다.
이에 맞서서 마가는 진정한 구원자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 선포했던 것이다. 예수가 진짜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을 통치하신다고 믿고 설교하고 고백했던 것이다.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마가복음은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다. 결론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시작일 뿐이다. 또다른 저자들이 자신의 복음서도 쓰고, 복음에 관한 편지도 쓰고, 묵시록도 썼다.
마가복음은 원래 16:8절로 끝난 책이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부활 소식을 전하는 청년의 말을 듣고는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며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황당한 결말처럼 보였을까? 후대의 편집자들이 9절부터 20절을 기록했다. 그리고 괄호열고 괄호닫기를 하였다. 내 생각에 후대의 저자들은 마가의 의도(시작)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결론을 내려고 한 것 같다. 복음의 전편 속에 후편의 얘기를 하고 만 것이다. 문학적으로 볼 때 아쉬움이 크다.
과연 여인들은 이후 아무 말도 못했을까? 그 엄청난 일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기쁜소식 이전에 너무도 무섭고 황당한 일이었기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해야 좋을 지를 몰라했던 그들의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닐까?
복음의 시작, 그 이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복음의 시대를 열었다. 그 후 그를 따르는 교회 공동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오늘날의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신 복음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힘써 지키며, 무엇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사후 천국인가, 하나님의 나라인가? 영혼 구원인가, 창조 세계 전체의 구원인가? 제국(국가)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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